햇살을 소환하다 / 유병숙

 

 

 

히말라야 남체바자르(해발 3,340m)에 당도했다. 문득 마을이 나타났다. 노란색으로 칠해진 집들, 판잣집에 나무를 덧댄 모습 등은 마치 우리네 70년대로 회귀한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집과 밭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낮은 돌담은 좁고 구불거리는 길을 낳았다. 언뜻 반짝이는 빛이 보였다. 빛의 실체는 한 귀퉁이가 찌그러진 양은냄비였다. 반들반들하게 닦아낸, 마치 은 식기처럼 번쩍이는 냄비가 햇빛과 교신 중이었다. 담 위를 점령한 그릇들은 넓적한 것, 둥근 것, 찌그러진 것, 평평한 것 등등 다양했다. 내쏟는 강렬한 빛에 눈앞에 하얀 반점이 생기더니 한참 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어느 아낙의 손길일까? 이곳에 우리네와 닮은 습성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갓 결혼한 새색시는 아닐까? 아니면 어느 주부 9단의 솜씨일까? 금방이라도 그녀들이 담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아는 척할 것 같았다. 양은냄비를 닦아 햇빛에 말리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지. 햇살에 몸이 녹아 노곤해졌다. 천천히 시계의 태엽이 거꾸로 감기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한 지붕 네 가구가 살던 집엔 너른 마당이 있었다. 엄마와 이웃의 아주머니들은 늘 마당 수돗가에 모여 앉아 지푸라기에 잿물을 묻혀 놋그릇을 닦았다. 힘이 든다며 불평하는 말이 노상 들려왔다. 고무장갑도 없던 때라 엄마의 손은 늘 거칠거칠했다. 물정 모르는 나는 놋그릇은 그야말로 녹이 많이 피는 무거운 식기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인가부터 양은그릇이 수돗가 화두로 떠올랐다. 그때는 양은그릇이 귀했다. 옆집 아주머니가 장만한 양은냄비를 자랑하자 은근히 부러워하던 엄마는 드디어 놋그릇을 팔아 양은냄비로 바꾸어왔다.

엄마는 양은냄비에 된장찌개를 끓여 꽃무늬가 그려진 양은밥상에 올려놓았다. 가볍고, 빨리 끓어 좋다고 했다. 엄마가 웃으니 괜스레 나도 좋았다. 하루는 양은냄비에 끓여준 삼양라면을 남동생과 머리를 맞대고 먹기도 했다. 그때 그 맛을 어디 가면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그 후에도 엄마는 여전히 수돗가에 앉아 있었다. 아주머니들과 경쟁적으로 양은냄비를 닦고 있었다. 다 닦은 냄비를 햇빛 바른 장독대에 널어놓으면 빛이 내려와 앉았다. 거울처럼 반들거리는 냄비 뚜껑을 들어 얼굴을 비춰보기도 했다. 왜 어른들은 너나없이 양은그릇을 햇빛에 말리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볕에 겨워 졸기도 했다.

어느 날 엄마가 시장에 간 사이 집안의 어르신들이 갑자기 우리 집을 방문하였다. 처음 뵙는 분들이라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부엌을 들여다보던 그분들은 반짝반짝 빛나는 냄비들을 저마다 들고 살펴보더니 “병숙이 에미 살림 참 잘하네…. 칭찬을 쏟아냈다. 나는 되레 어리둥절한 마음이 되었다. 고작 냄비 닦아 놓은 게 무슨 칭찬받을 일이란 말인가! 그 방문을 계기로 엄마는 문중 어르신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 한다. 그 후 엄마는 습관처럼 냄비에 윤을 내었고 나는 안쓰러워 왜 힘들게 매일 닦느냐고 짜증을 내기도 했다.

결혼 후 시댁의 부엌살림을 맡게 되었지만, 시어머니는 내게 무얼 하라는 말씀이 통 없으셨다. 햇빛 좋은 날, 시어머니는 양은냄비들을 몽땅 마당 수돗가에 내놓으셨다.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그 많은 냄비를 하나하나 닦기 시작했다. 그 일은 한나절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시키지 않으니 감히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시어머니의 표정은 의식을 치르는 듯 사뭇 진지했다. 티끌 하나 없이 닦여진 그릇들이 화단에 올려졌다. 햇빛을 뿜어내는 냄비들을 바라보자면 경외감마저 느껴졌다.

나도 할 수 있을까? 경원시하던 일에 갑자기 호기심이 일었다. 시어머니가 모임에 가시고 집이 텅 빈 날, 마침 볕이 좋았다. 나는 냄비들을 끄집어내었다. 닦다가 다 되었나 싶어 돌려보면 또 그을음이 보였다. 어깨가 결리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엄마와 시어머니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열심히 냄비를 닦은 걸까? 다시 불에 올리면 또 더러워질 것을. 나는 입속으로 투덜거렸다. 걷어치울 양으로 일어섰다가 문득 닦아서 화단에 올려놓은 냄비들을 보았다. 그릇마다 햇빛이 담겨있었다. 쏘아내는 빛에 눈앞이 하얘졌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했다. 차오르던 생각들은 밝은 빛에 부서졌다. 그날 이후 햇빛은 주술처럼 나를 불러댔고 나는 화답하듯 냄비를 닦곤 했다.

돌이켜보면 무엇 하나 녹록지 않았던 나날이었다. 시간이 물처럼 흘렀지만 먹먹했던 마음은 지워지지 않았다. 에베레스트를 향하는 도중, 하늘 가까운 동네에서 만난 햇빛이 젊은 날의 나를 소환했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마음에 담겼던 햇살을 찬찬히 응시한다. 햇살이 등을 두드렸다. 나는 햇빛 속에 오롯이 앉아있던 그 날의 나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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