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삶 / 정목일

 

 

 

겨울바람은 추위에 떨게 하지만 삶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바람에 기가 죽지 않으려면 마음을 굳게 먹고 물러서지 않아야 한다. 추운 바람이 요동쳐도 굳건히 서 있어야 한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바로 삶의 터전임을 알아야 한다.

겨울의 나무는 맨 몸이다. 앙상한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사방으로 뻗은 가지들이 흔들리고 있지만, 나무는 균형을 이루고 있다. 꽃과 잎을 달지 않은 맨 몸이건만 정갈해 보인다. 내놓은 알몸도 추위에 위축되지 않은 모습이다.

겨울나무는 사색 중이다. 동한기를 맞아 수도에 빠져 있다. 누구에게도 말을 나누지 않는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도 소리가 침묵 속에서 들리는 듯하다.

겨울엔 나무들의 뿌리가 보이는 듯하고, 하늘로 치켜 오른 가지에서 삶의 근육과 힘살이 보인다. 겨울이면 나무들은 바깥의 풍성함을 구가하지 않는다. 바깥의 모습이 아닌 내면의 진실을 찾고 마음을 연마하는 중이다. 겨울에는 메마른 듯 밋밋한 가지들이 수액을 빨아올리는 깊은 호흡과 내공을 보여준다.

겨울나무는 꽃과 열매를 지니고 있을 때와는 달리 고독 속에서 사색의 표정을 보여주고 있다. 혹독한 겨울의 말을 들으며 바람에 몸이 흔들리고 있다. 겨울을 견뎌 내려면,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나무들은 꽃과 잎을 떨쳐버린 후 맨몸이 되어, 이웃에 있는 나무들과 인사를 나눈다. 가지들을 하늘로 향해 뻗어 올려 삶의 궁전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한 톨의 나무 씨앗이 싹트는 곳은 생명의 발판이다. 세상에 나무가 없다면 인간이나 짐승을 비롯한 생명체들은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세상에 나무가 없다면 삶의 정서와 안정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꽃과 숲이 없는 삶터는 삭막함을 느끼게 한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어야 마음이 향기롭고 평온함을 얻게 된다. 겨울의 삭막함은 초록빛 산, 숲, 들판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꽃과 나비와 곤충을 볼 수도 없다.

겨울나무는 묵언정진 속에 빠져 있다. 해마다 나무들은 삶의 일탈을 벗어버리고, 새로움을 창조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겨울나무는 태양과 눈 맞춤하면서 온기를 받아들이고, 바람과 교류하면서 얘기를 주고받는다.

겨울나무는 시련과 인고를 견뎌내고 추위와 바람 속에서 새 움을 키워낸다. 움 속에는 꿈과 꽃과 나비의 날개 짓이 있다. 나무는 눈보라와 추위가 있기에 성장하고 꿈을 키워간다. 새들을 불러들여 삶의 말을 듣기도 한다.

겨울나무는 앙상한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지만,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 정성을 다하고 있다. 한 송이의 꽃을 피우며 봄을 여는 일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겨울 동안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피워낸 꽃 한 송이는 봄이 왔음을 알려준다.

겨울바람에 억눌려 떨곤 했지만, 어느새 목련꽃은 봄을 맞고 있다. 하얀 목련꽃이 피면 노란 개나리도 피어서 화사한 봄을 반기게 되리라.

‘봄’은 겨우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됨을 말한다. 봄은 침묵과 고독 속에 묻혀있던 나무들을 깨어나게 하고, 어느새 풀꽃들이 피어나는 경이와 신비를 목격하게 한다. 봄이면 새로운 탄생의 기적을 보여준다.

추운 겨울을 이겨낸 나무들은 봄을 맞아 햇살, 하늘, 바람, 물…. 어느 하나 반갑지 않은 게 없다. 봄이 오면 한 그루 나무가 되어 꿈과 성장을 안겨주는 햇살의 노래를 듣고 싶다. 햇살은 만물에게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는다. 땅속에 묻힌 씨앗들을 깨워내고 존재의 모습을 찾게 만든다.

나무들은 뾰쪽뾰쪽 피워낸 초록 잎 새 위로 눈부시고 향기로운 향유를 바르고 있다. 따뜻한 햇살로 가지마다 잎을 피워내 푸릇푸릇 근육을 키우고 사계의 모습을 그려내는 위대한 화가이다. 햇빛이 아니고선 어떤 잎과 꽃이든 피워낼 수가 없다. 고통과 인내 속에서 견뎌낸 세월의 선물이 아닐까. 새 움은 침묵이 피워낸 부활의 얼굴이다. 어둠에서 솟아오른 꿈 망울이다.

혹독한 추위를 이겨낸 나무들이 어떻게 자신을 치장하며 햇살을 반기고 있는가. 어린 나무들보다 나이 많은 나무들이 더 깊고 풍부한 색깔을 뿜어낸다. 백년, 이백년 넘는 노거수의 늠름하고도 두터운 초록 빛깔엔 어린 나무들이 따를 수 없는 체험의 세월과 지혜가 보인다.

이 때쯤이면 겨울나무를 마음속에 되새겨 본다. 겨울나무들의 벌거벗은 맨 몸을 그려본다. 바람이 주는 말도 생각해 본다. 나무들은 겨울 동안 묵언정진 속에 전신의 힘을 다 쏟아 새잎을 피워내고 있다. 겨울 동안의 고독에서 이룬 성숙과 정진을 본다. 스쳐 지나가던 바람의 말도 떠올려 본다. 겨울나무들은 꽃과 잎을 떨쳐버리고 맨 몸이 되었다. 정적 속에서 옆의 나무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공중으로 뻗어나간 가지들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있다. 땅에 떨어진 씨앗들이 하나씩의 생명체가 되어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사방으로 뻗은 가지들이 서로 눈을 맞추어 균형을 이루고 있다. 가지는 가지대로 잎은 잎대로 마음으로 흐르는 소망과 균형을 맞추어서 평온의 표정을 보이고 있다.

나무의 삶처럼 경이로운 모습도 없으리라. 사람이 나무들의 삶처럼 계절마다 새로움을 구가할 수는 없지만, 봄철이면 초록 잎새를 피워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가지마다 방울방울 잎눈을 틔어 새 잎을 피워내고 싶다. 늙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을 테지만, 마음속으로 초록 잎을 피워내고 싶다.

나무를 보며 나의 삶을 묻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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