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상 수필은 그 의미가 다의적(多義的)이다.

▲ 윤재천 수필가

수필은 자연현상과 함께 각기 다른 삶의 실상과 그에 따른 경험을 기록할 목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대중화되어

있는 문학이다.

수필은 형식이나 내용에 제한이 없는 글로 인식되어 있어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글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지만,

이런 기존의 인식이 수필의 어려움이기도 하고, 한계로 작용하기도 한다.

수필의 내용이 작가의 삶의 모습이라는 선입견이 강함으로써 창작과정에 부담으로 작용한다.

수필은 경험의 기록이기도 하고, 기대하는 소망의 피력일 수도 있어 다양한 것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경계를 넘어 다양성을 토대로 자라나야만 미래를 바라보는 수필이 된다.

다의적 수필은 그 특색이 불투명한 메시지로 독자에게 다가가지만 '이미지'를 제공해준다.

공자(孔子)도 '군자(君子)는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지, 어느 도(度)를 넘치게 되어 담을 수 없는

그릇이 되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의 통로를 막아놓고 무조건 '좋은 수필'의 출현만을 기대하고 있는 상황과

다르지 않다. 이는 성장의 동력인 DNA-유전자의 본체(本體)와의 접속을 차단해, 수필의 깊이와 넓이가 불어나길

기대하는 일과 같다.

수필은 과감한 변신이 필요하며 그 형식이나 문체가 기존의 틀에서 확고하게 벗어날 수 있는 인식의 전환이 중요하다.

이러한 현상은 무조건 기존의 것을 베어버리고 새로운 것을 주입하고자 함이 아니라, 전통작품에 아방가르드적

글쓰기 방법을 적용시켜 그 세계를 넓히고자 함이다.

기존수필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감성(感性)과 구상적(具象的) 소재에서 발아(發芽)된 글은 이제 한계에 봉착해 있어

새로운 영토의 확장이 필요하다. 그동안 수필이 직접 경험하거나 누구나 지각(知覺)할 수 있도록 일정한 형태와 특성을

갖춘 소재를 중심으로 화제(話題)를 전개하려고 했던 것은 작품의 중요한 객체(客體)인 독자와의

소통을 원만케 하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을 때, 결과는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섬과 다르지 않다.
변화에 대응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다 한복판에 감금된 섬의 모습과 같게 된다.
진리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해선 작가는 지성과 감성, 새로운 시도를 동원하여 불특정 다수와 자신에게 활기(活氣)를

충전할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해주며 그 반향을 관찰해야 한다. 이는 상대의 비위나 상황에 동하도록 유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다가 막힌 길을 찾아 걸음을 옮기듯 새로운 방향의 모색을 위함이다.

그러기 위해 반추상(半抽象) 수필이 절실하다.
서양의 화단(畵壇)에서도 화가의 화필(畵筆)에만 의존해 순간의 영상을 기록한 시기가 있었다. 그 후, 카메라가

발명되고 대중화되면서 '그림의 시대'가 끝나는 줄 알았지만 이 자리를 추상화가 차지해 세(勢)를 넓히면서

오늘과 같은 부흥시대를 이룩한 것이다.

모든 것은 작가와 독자에 의해 그 의미와 가치가 만들어지고 쇠퇴하기도 한다.
시장물가로 볼 때, 재래시장은 발전해 발을 들여놓을 틈도 없이 흥성하는 반면, 백화점 같은 비교적 물건 값이 비싼

매장(賣場)은 현상유지도 어려울 것 같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사회적 관심은 다양하고

이것이 만들어내는 현상도 그와 같이 여러 모습을 띠고 있는 시대적 증상이다.

그 구체적인 예로, 신문화 초창기 현대문학의 여명기에 이상(李箱)의 난해한 시와 소설, 그 외의 작품들이 선을 보였을 때,

'잠꼬대 같은 소리'라는 비난을 면하지 못했으나, 그의 문학은 오늘날까지 그 진가(眞價)가 훼손되지 않고 많은 연구자의

노력을 통해 내실(內實)이 있는 작품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것은 작가의 눈이 미래를 향해 열려 있었기 때문이고 작가의 노력이 그만큼 진지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이상(理想)이 담긴 글이 내일의 문을 두드려 열어야만 더 큰 세계와 문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경험이나 소개하는 정도의 글이 무가치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대를 초월해 감동을 낳게 해줄 산물이

되기 위해서는 작가는 몇 걸음 앞서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수필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이제 반추상 수필을 향해 도전하여 새로운 도약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인간학인 수필문학이 깨어 있을 때 다른 문학도

발전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수필은 확보된 독자층이 예상보다 많아 문학의 기층(基層)을 수필이 차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런 면에서 '수필이 발전해야만 문학과 문화도 확장될 수 있다.'
가야할 길은 그 과정이 아무리 험난하고 고통이 따른다 해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가치를 무시하고 안주하는 것은

행인(行人)의 자세가 아니다.

'반추상의 글'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우선 과제로 떠오르지만, 이를 우리 모두의 과업으로 정진을

계속할 때 수필문학은 크게 발전할 수 있다.
 
반추상(半由象)이란, 반구상이란 말과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새로운 길, 걷지 않아 익숙하지 않은 길을

함께 걷는 것으로-미술에 견주어 추상화와 구상화의 중간 성격의 그림과 같은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독자의 호기심어린 기대가 오늘의 수필의 성(城)을 이루어놓은 만큼 우리의 기대가 다시 현실을 뛰어넘을 때 수필은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잠재적 보고가 된다.

이것이 예술적 작품을 낳기 위한 수필의 본령이고 우리가 걸어가야 할 또 하나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 윤재천
수필가.《현대수필》발행인

[《현대수필》2011년 가을호(권두 에세이)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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