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차숙의 아방가르드 문학>
정통성에 대한 몇 가지 모반
유한근 (문학평론가 ·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교수)
1.
오차숙 작가의 작품 세계를 편의적으로 성격을 구분해야 한다면, 그의 수필은 실험문학권에 편승시켜야 할 것이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도한다"는 에세이의 어원에 충실한 시론(試論)적인 수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수필을 '퓨전수필' '해체수필' 혹은 포스트모던적인 수필이라는 장르적 분류 또한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수필은 기존의 정통 수필에 다분히 모반적인 혹은 반역적인 수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수필이 어떤 성격으로 규정되든 그러한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부분이, 실험정신 혹은 자유정신이 미래 수필의 새로운 가능 지평을 여는 지표를 제시하고 있는가가 중요할 것이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 오랜 동안 지켜보아 왔음을 토로한다.
오차숙은 <나의 삶 나의 문학-1-> 첫 문장에서 “눈을 감고 지그시 '삶'을 응시 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조용히 지그시 '글'을 응시해보고 싶"다고도 했다. "이 땅은 영혼을 풀어 넣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며, "무한한 시간 속에 깊숙이 침잠되어 양귀비 한 송이 피우고 싶기 때문"이고,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가 되더라도 주변의 모든 것이 아이의 웃음이 아니더라도 번개 번쩍이는 우박 속을 헤집으며 시이소 놀이를 하고 싶다”고도 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굿마당으로 흥(興)을 부르는 혼(魂)바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차숙 작가의 이 수필을 이해하는 데 있어 우선해야 할 전제사항은 화두처럼 던진 위 인용문의 은유와 상징 구조를 해명하는 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 수필의 부제인 '회색지대' '이 땅은' '영혼' '양귀비' '사막과 낙타' '아이의 웃음' '우박' '시이소 놀이' ' 굿마당' '혼 바람'이라는 언어가 은유·상징·아이러니하고 있는 그 구조부터 해명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제인 '회색지대'를 키워드로 해서 탐색해나가야 할 텐데 그 일이 쉽지 않다.
"春·夏·秋·冬도 회색지대, 元·亨·利·貞도 회색지대"라고 이 수필에서는 표현하고 있는 것부터가 그러하다. 춘하추동은 사계절, 즉 시간 개념을 나타내고, 원형리정은 주역의 괘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때, 자연의 이치 혹은 우주의 운행이나 이치가 회색지대라는 말인데, '회색지대'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가 의미의 요체이다. '회색'은 흰색과 검은 색 즉 미명(未明)을 말하는 것으로, 질서와 무질서가 혼합되어있는 중간 지대. 혼돈, 카오스를 일차적으로 의미하는 색채이미지이다.
이에 대한 해명을 위해 이 수필을 계속 이어보자.
연극 같은 인생 오버액션 하는 삶이 무슨 흠이 되더이까 이름 모를 주사위라도 붉은 테이 블 푸른 테이블 위에 놓여있지 않더이까 영원의 길 불멸의 길은 이와 다르지 않기에 도박 의 진미는 필연보다는 우연이외다 삶을 요리하는 것도 도박의 한 페이지 문학이라는 것도 끊임없는 무의식의 멜로디 손길 가는 모든 것들이 미완성으로 끝난다 하더라도 원(元) 형 (亨) 리(利) 정(貞) - 카오스 → 창조 → 절정 → 소멸의 시기는 완전한 세계가 아니라오 때때로 불명의 음표들이 괴성을 지르더라도 우발 성을 요리해 보려는 연주자가 되어 음표 를 달래가며 비탈길처럼 편곡해 보리이다 (*이 작품에도 마침표가 없다)
-수필 <나의 삶 나의 문학-1-> 중에서
작가 오차숙이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문학을 통한 영원의 길, 혹은 불멸의 길에 대한 모색, 그 모색의 삶을 오감을 통해 관조 또는 직관에 의해 가능함을 환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지금 '보인다' 말을 썼다. 단정을 지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의 수필은 여느 수필과는 다른 변별성을 지니고 있다. 앞서 그의 수필을 이 하는데 있어서 은유나 상징 구조 등등을 전제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가 그것이다. 계속 살펴보겠지만, 오차숙의 수필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는 많은 장애가 있다. 그 장애는 문학적인 표현구조를 즐겨 차용하기 때문이다. 시에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구조들을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느 수필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삶의 단편적인 삽화, 에피소드보다는 그의 수필은 내면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 은밀한 영혼의 소리와 그 색채를 끌어내려 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기존에 대한 - 한국수필정통성에 대한 그의 모반적 창조 행위이다.
산문적인 의식의 흐름에 따르기 보다는 운문적인 의식의 흐름에 따라 문맥을 잡아나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수필은 잡다한 이야기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매력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신변잡기를 거부하는 진정한 문학의 매니아나 새로움에 목말라하는 독자들에게는 큰 매력일 수도 있다.
그 매력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다음 수필도 읽어보자.
하지만, 삶다운 삶을 음미하는 오감(五感)을 잃어버린 지 오래 되었다. 나의 코는 무척 진지하고 예민했지만, 추구하던 이상(理想)의 세계가 너무 멀어 후각 자체도 마비되어 버렸 다. 그러나 오감을 접어두고 길을 털털 걸어가니 생각 없는 삶 하나로도 배고픔 당하는 일 은 있지 않았다. (...) '내 삶과 나의 문학'은 나에겐 하나의 예술과 자유, 사랑과 철학이므 로 상처 부위를 치료해가는 종합병원 역할을 해주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곳엔 무언가 토해내고 싶은 정체불명의 마그마가 남아 있으므로, 존재감을 새김질해보려는 성찰 의 장터로 남겨놓고 있다.
-수필 <나의 삶 나의 문학-2-> 중에서
앞에 소개한 수필이 작가의 삶과 문학을 '회색지대'로 해명하고 있다면, 이 수필은 그 연장선에서 '시래기'라는 질료로 글을 시작한다. "찜통에 시래기를 넣고 푹푹 삶아본다"는 첫 행이 그것이다.
건조한 시래기와 문학의 존재감이 비약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어 당혹스럽지만, 이 수필에서 우리는 작가의 세계관을 엿보게 된다.
특히,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내 삶과 나의 문학'은 나에겐 하나의 예술과 자유, 사랑과 철학이므로 상처 부위를 치료해가는 종합병원 역할을" 해준다는 토로와 "존재감을 새김질해보려는 성찰의 장터로 남겨놓는다“는 토로는 감동적이다.
그리고 "내 삶과 문학이 새벽이면 맥없이 사라지고 마는 달(月)의 형상이 될지 모르지만, 태양을 출산하지 못하는 거세된 여자로서 불임자로 존재할지 모르지만, 내 의식은 아직도 파도의 열정처럼 순박한 삶을 살아가고 싶은 아이러니가 있으니, 문학 또한 그 창백한 땀 흘림으로 인해 상처 입을지 모르겠다"는 토로 또한 주목된다.
작가는 이 수필에서 삶과 문학을 총체적으로 성찰하며 그 존재의 가치를 가늠한다. "삶의 뒤안길엔 회색지대와 청색지대가 공존"하듯이 자신의 문학도 그러한가? 자신의 문학은 과연 청색지대인가? 자신의 삶과 자신의 문학은 자신의 것이 아닌가에 대한 존재 의혹과 자신 문학의 영구성, 그리고 의혹에 대해 처절한 반성을 하고 있어 우리 모두의 문학에 대해 환기하는 기회를 준다.
절대 고독과 절대 외로움을 통해서만 가능해진 내적 성찰이다.
2.
수필 문장은 산문으로 쓰여진다.
일반적으로 문장의 배열이 일정하지 않은 운문으로 쓰지 않는다. 그래서 산문으로 쓰는 문학의 대표적인 장르를 수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수필을 운문으로 쓰지 말라는 문법은 없다. 작가 오차숙은 수필은 산문으로 써야한다는 문장 관례를 거역한다. 이 또한 정통성에 대한 모반이다. <음음음음 음음음>에서는 "음음음음 음음음"과 "생(生)은 한 판의 춤사위로세"를 후렴구로 반복해서 쓰고 있다. 운문시의 기본적인 형태를 차용한다. 그리고 종결어미의 경우도 "~소" "~오" "~라구" 등 구어체 어미로 운율을 살리고 있다.
운문체 문장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흔히 고조되는 격정적인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효과적이기 때문에 절제미를 포기하는 경우이다. 예컨대 이 수필에서 볼 수 있듯이 "오호라" "오호라 맞소"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혹은 사회에 대한 비판이나 질타를 반복적으로 할 때 효과적이라는 점에서 차용하게 된다.
<음음음음 음음음>과 같은 맥락의 수필은 <홀로 있음이 춤이 됐나> <목련이 툭툭 터지는 날>등의 작품 등이다.
음음
홀로 있음이 춤이 됐나
봄의 비밀이 번쩍이는 정원에 영혼의 사슬이 채워져도 별수 없지 않은가 세속의 스산함을 땅위에 내려놓지 않는 이상 지당한 사슬이 아닌가
전진할 것인가 정지할 것인가 흔들리는 그 순간 찬란한 족쇄에서 벗어날 순 없지 않은가
-<홀로 있음이 춤이 됐나> 서두부분
<홀로 있음이 춤이 됐나>는 위의 인용문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음음/홀로 있음이 춤이 됐나"를 후렴구처럼 반복하여 운율을 살린다.
이 수필은 봄날, 땅속에서 지상으로 솟아오르려는 새싹들을 '고독한 영혼!' '신성한 영혼!' '사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영혼'으로 인식하는 수필이다. 그 인식의 감탄 소리가 제목인 "홀로 있음이 춤이 됐나"이다. 다분히 시적인 발상이고 시의 표현 구조적이다.
<목련이 툭툭 터지는 날>도 마찬가지이다.
음음
인연이면 다 인연인가
늘상 만나 웃는 일 잦다 해도 사람이 사람을 향한 마음의 통로가 어디 순탄한가 짧은 인 생 살면서 마음에 와 닿는 인연 어디 그리 흔한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오묘하고 야릇 한 유희가 아니던가 만나서 껄껄껄 부자가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 <목련이 툭툭 터지는 날> 서두부분
<목련이 툭툭 터지는 날>은 "음음/인연이면 다 인연인가"를 글의 첫머리와 끝머리에 액자처럼 구조해 놓고 있다. 이 글도 다분히 시적 발상이다. 목련이 툭툭 터지는 날 작가는 '인연'이라는 언어를 관계양식과 존재양식으로 탐색해본다 그것도 독한 인연을 생각해본다. "음음/인연이면 다 인연인가"라는 화두를 놓고 진득한 형제자매와의 도타움, 부모자식간의 인연보다도 더욱 끈질기고 지독한 인연의 정체성을 탐색한다. 어떤 인연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오늘처럼 목련이 툭툭 터지는 날"이면 눈물겨운 님과의 인연이 중요할 뿐임을 인식한다.
또 한편의 글 <안식을 모르는 영혼>을 보자.
긴 우울 속에서.
긴 고독 속에서.
처절한 사슬의 해방, 그 아이러니한 영혼의 해방을 위하여.
바람아!
- <안식을 모르는 영혼> 결말 부분
<안식을 모르는 영혼>도 다분히 시적이다. 발상도 그러하고 문장이나 구조 등도 그러하다. 이 글의 대상은 '바람'이다. '바람'에 대한 인식의 글이 아니라, '바람'에 작가의 마음과 영혼을 의탁한 글이다. 위에 인용한 부분은 해방, 그 자유를 위해 안식을 모르는 영혼에 대한 인식을 쓰고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작가 오차숙의 문학 장르 파괴 의식을 점검해야 할 것이다. 이 또한 정통성에 대한 모반이기 때문이다. 진솔하게 토로하건대, 필자인 나도 문학 장르에 대한 억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다. 사회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필요에 의해 사회적 약속 혹은 개인적인 약속에 의해서 생겨난 문학 장르는 언제든지 해체되어도 좋고 파괴되어도 좋으며, 새로운 형태의 장르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장르 의식으로부터 완전 자유롭지는 못하다. 글쓴이가 쓰고 싶은 내용에 따라 그 형태는 언제든 변형되어도 좋다고 느끼면서도 대학 강단이라는 위치에서 나는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한다.
하지만, 문학의 속과 곁에 대한 절망이 없는 한 장르적인 국면에서 새 지평은 열어 놓아야 한다는 생각은 양보할 생각이 없다. 글 쓰는 사람을 장르에 따라 구분하지 말고 서양처럼 POET(시인)으로 통일해서 부르고, 그 사람이 쓰는 글은 '시'라 부르면 어떤가? 이러한 나의 객기도 어쩌면 장르 의식 때문에 생긴 것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작가 오차숙의 수필을 수필로 명명하든 시로 명명하든 여기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자명한 사실로 전제한다.
3.
<이관규천(以管窺天)>은 '대롱으로 하늘을 엿본다'라는 뜻이다. 이 글도 시라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시든 수필이든 위에서 전제했듯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나 죽어
후생(後生)에서 삶을 이루게 된다면
무엇보다
이름 모를 남자와 짝을 이루게 된다면
진흙 속을 헤집으면서도 연꽃으로 환생 하거나
뙤약볕 속에서라도
생수(生水)를 기다리는 양귀비가
되겠어
찬란했던
전생(前生)의 문화
(중략...)
-<이관규천(以管窺天)>에서
위의 <이관규천(以管窺天)>은 불교적 상상력으로 후생의 삶에서 이생에서 하지 못했던 욕망을 선험해 보려는 의지를 담고 있는 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마지막 연의 "밀림 속의 원시(原始)를 토하도록 하여/막혔던 오감(五感)과 혈관이 펑 뚫어지도록/하겠어"에 나는 주목하게 된다.
글 쓰는 이는 간헐적이지만, 자신의 인식이나 통찰력에 문제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사물이나 사상(事象)의 본체나 본질에 통찰하는데 있어 자신의 인식과 감각이 얼마나 굳게 차단되어 있는가를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대롱으로 하늘을 보는 것처럼 편협 적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음을 스스로 알게 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물이나 사상(事象)의 원천적인 본체를 탐색할 수 있는 열린 감각이 필요함을 이 글은 강조하기 위해 후생에서의 삶의 모습을 패러디하고 있는 것이다.
'향나무 한 그루'라는 부제가 붙은 <장르를 뛰어넘어>는 의도적으로 행과 연을 나누어 시의 외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나무 한 그루가
그 거리에 서서 울고 있다
그 거리에 서서 웃고 있다
도심과 도심 속에 무릎과 내장(內臟)까지도 깊숙이 숨긴 채 그 흔적 그 형상 개미똥 만큼 도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만 삭히며 울고 있다 검붉은 입술을 앙 다문 채 해오라기 형상으 로 웃고 있다
(중략...)
바람의 통증이 올인(all in)할 때까지
구름의 통증이 올인(all in)할 때까지
-<장르를 뛰어넘어> 서두와 결말
<장르를 뛰어넘어>는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 문학 장르의 형태보다는 그 글의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향나무 한 그루'는 작가 자신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 거리에서 서서 울고 웃는 존재물이 사람일 수도 있고 사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삶은 모험의 강강술래' '예술의 무대는 아이러니한 춤사위' '영(靈)적 놀이는 삶의 대 극치'라는 키워드다.
여기에서 '아이러니한 춤사위'라는 키워드는 여러 작품에서도 나오는 표현이지만, 오차숙 작가의 글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 역할을 하는 언어이다. 반어적 창작 행위, 불확실한 예술 행위, 문학가치의 불투명성 등, 그 무엇도 자명한 것이 없는 우리 삶의 본체 등 그 모든 것의 총체성이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모티프는 '사랑'이다.
이에 따라 오차숙 작가는 <명작(名作)에서 훔친 사랑의 논쟁>라는 수필에서 새로운 형식으로 수필을 쓰고 있다. 소제목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에서는 캐츠비, 베르테르, 그리고 독자의 넋두리로서 명작 속의 주요 인물을 등장시키고, '여자가 남자를 사랑할 때'에서는 에밀리,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독자의 넋두리를, '서로가 서로를 사랑할 때'에서는 로체스터, 제인 에어 그리고 독자의 넋두리로, 등을 인물로 등장시켜 사랑에 관한 담론을 서평처럼 전개한다.
그리고, <차라리, 구명조끼를 벗고 싶다> 에서는 작가의 문학세계에 영향을 준 사람들에게 '감사 무한제곱'을 드리는 헌사와도 같은 글이면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모반을 꾀한다.
감사 무한제곱
수용하는 삶도 삶이기에 현실에 순종하며 살아간다.
(중략...)
나에게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 전혜린이나 루 살로메 같은 여자가 되거나, 이름 없는 수녀나 비구니가 되는 것....
때로는 전혜린처럼 자신의 길이 아니면 과감하게 길을 틀어, 미지의 세계를 향해 도전하 고 싶다.
흐르는 물살이 자신의 코드와 어긋났을 때는 그 물살에 역행하며 주관을 가지고 헤엄치고 싶다. 지루하고 남루한 삶에 견디지 못했을 때는 짧고 강렬하게 삶의 연출을 변형시키고 싶다. (중략...)
전혜린과 루 살로메!
이 여성들이야 말로 내 초라한 의식의 영토에 사랑의 끼, 문학의 끼, 몰두의 끼, 상상의 끼, 철학의 끼, 모험의 끼를 공급해준 뮤즈들이다.
-<차라리, 구명조끼를 벗고 싶다>에서
위 인용문은 작가의 문학세계에 영향을 준 가족과 스승 그리고 전혜린과 루 살로메에 대해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나 이 수필에서 정작 말하고 싶은 것은 전혜린과 루 살로메로부터 작가의 "초라한 의식의 영토에 사랑의 끼, 문학의 끼, 몰두의 끼, 상상의 끼, 철학의 끼, 모험의 끼를 공급해준 뮤즈들"이지만, 그것들이 그 자체 삶의 허상이라면, '사치'와도 같은 것이라면 버리려는 모반을 한다. 세상과의 현란한 인연을 끊고, 청결한 영혼의 세계를 자신만의 세계로 갖고 싶다는 마음을 토로한 수필이다.
수필 <해체, 포스트모더니즘적 춤사위> 또한 제목부터가 반항적이며 구성 또한 그러하다. 이 수필은 '질주, 하나' '질주, 둘' '질주, 셋'으로 단락을 나누어 구성하고 있다. 다음에 인용한 부분은 결말 부분이다.
가난한 영혼이여 조용히 두 눈을 감고 넓은 길을 걸어가라.
정로(正路)를 향해 고함을 지르며 인내의 땀을 닦아보라.
불안감과 분노가 껄껄껄 숨바꼭질 하더라도 선지자의 제사로 인하여 너의 아내 마리는 건강한 초상으로 환원되지 않았는가.
십자가의 우렁찬 그늘 아래서 회개와 죄사함을 바탕으로 -보이체스, 너와 함께 구원과 부활, 영원을 꿈꾸고 있으니까.
-<해체, 포스트 모더니즘적 춤사위> 결말부분
여기까지 몇 편을 읽어오는 동안 작가 오차숙은 '질주, 하나'에서 말했듯이 우리 사회를 "혼돈이라는 괴물과 물질문명의 속삭임에 유혹당한 곳"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들을 "고유의 본질을 망각한 채, 초조한 모습으로 유배당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초상들로, 슬픈 초상들로, 또한 이들의 행위를 가면 쓴 행위로 규정하며, "불투명한 언어의 춤사위"로 인식하고 있다.
'질주, 둘'에서는 마찬가지로 우리를 연극 '현대인의 슬픈 초상'의 보이체크로 은유하고 있다. "모험과 환상, 불안과 미지의 세계를 향해 저주를 퍼부으며 질주를 중단할 수밖에 없"는 얼룩진 초상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질주, 셋'에서는 위의 인용문처럼 작가는 현 시대의 초상들에게 구원과 부활과 영원을 꿈꾸라고 말한다. 작가는 현대 사회를 해체시대, 포스트모더니티한 시대로 규정하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슬픈 초상들로 우리를 인식한다. 그들은 아이러니한 공허감과 결핍된 욕망, 상실한 사랑으로 고통스러워한다. 그러한 초상들을 구원해주고 부활의 개념을 찾아주고 영원을 꿈꾸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문학이라고 작가는 믿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오차숙 작가는 <무인도(無人島). 그 섬에는 파도가>에서 정훈희 가요<무인도>, 패티김의 <빛과 그림자> 그리고 윤심덕의 <死의 찬미>를 인용하면서, 컴퓨터 자판의 문자표를 과감하게 차용하다. 이 또한 수필의 새 지평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지표인 셈이다. 인간 삶의 제 감정적 모티프가 묻혀있는 가요를 재음미하고 있는 그 자체로 그러하다. 가요의 가사를 하대하고 폄하하는 문단의 오만함에 대한 무언의 반항이기도 하다.
그들의 것들이 "감성이 허약한 자들에게 삶의 색상이라도 제시해주며 그들만의 예술혼을 남기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남루한 영혼을 위로해주는 '언어' 그리고 '멜로디', 그리고 그들만의 '예술혼'을 환기하면서, 문학이 우리 인간과 사회의 마지막 보루임을 믿기 위한 하나의 위안일지도 모른다.
문학은 그 힘을 잃었다. 곧 폐기처분될 것이라고 자포자기 한 사람들도 있다. 문학이 작게는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환상까지도 버리는 시대이다.
이런 남루한 우리 시대에, 작가 오차숙의 문학은 예술혼은 무엇이며 문학정신이 무엇인가를 '왜 문학인가'를 환기시켜 준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 새 문학의 지평'이라는 화두를 우리들에게 새삼 던져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