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에 관한 보고서/ 장미숙

 

툭, 툭, 소리에 날이 서기 시작했다.

소리는 허공에 깊은 파열음을 내고 주위로 퍼진다. 헐거워진 싱크대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집요하게 고요를 흔든다. 수도관이며 수도꼭지도 처음에는 흐름과 차단이 완벽했을 테지만 세월은 느슨함을 용인했나 보다. 시간의 흐름이 가져온 느닷없는 반란이다.

샤워기도 마찬가지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이음새 아래 방울방울 물이 맺혀 있다. 청각과 시각에서 먼, 문을 닫아 버리면 그만인 곳이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어딘가 틈이 생긴 게 분명하다.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내리는 것들은 불편함과 성가심을 낳는다. 젊음과 늙음의 차이는 멈춤의 기능과 멈추지 못함의 혼란 같은 것일까. 흘러야 할 때와 흐르지 말아야 할 때의 경계가 사라지면 심연에 불안이 자란다.

신호등 앞 여럿이 서 있는 곳에서 한 노인이 척, 앞으로 나섰다.

빨간불에 아랑곳없이, 멀리서 달려오는 차쯤 안중에도 없다는 듯, 느린 걸음으로 차도 중앙에 들어선다. 달려와서 끼익, 멈추는 자동차의 경적이 고막을 찢는다. 그제야 놀란 노인이 엉거주춤 뒤로 물러선다. 불은 바뀌고 사람들은 재빨리 도로를 건넌다. 앞서는 젊은 사람들 틈에서 노인은 허둥지둥 발걸음을 옮긴다. 느닷없음과 늙음은 묘하게 같은 선상에 있다.

언젠가부터 바람은 눈물샘을 자극하는 경계의 단어가 되었다.

슬픔과 상관없이 눈물을 뽑아내는 바람은 늙음에 달라붙은 불필요한 관형사冠形詞 같다. 풋풋하던 어린 시절에 바람은 동사動詞로 휘날렸다. 역동적이고 발랄한 그 무엇, 바람을 타고 다닐 것처럼 민첩했던 날들은 맑은 피와 어울렸다. 살갗 온도보다 마음 온도가 높았던 시절에 바람은 유기물처럼 생생했다.

청춘 시절 바람은 형용사形容詞 같은 것이었다.

젊음을 수식해 더욱 빛나게 하던 액세서리로서의 바람이었다. 감성에 와서 예민하게 부딪히던 그 바람은 감정의 선을 넘나들었다. 때론 마음속 깊은 곳까지 건드려 에로티시즘을 꿈꾸게도 했다. 하지만 늙음으로 가고 있는 요즘, 바람이 먼저 와 닿는 부분은 살갗이 아닌 피부 속이다. 바람을 맞으면 눈물이 퐁퐁 솟는 늙음 앞에서 당황한다. 느닷없는 불편함이다. 잘못 끼어들면 여지없이 어색해지는 문장의 조사助詞처럼 중년과 노년은 혼란한 조사를 닮았다.

그 와중에 눈물의 짭짤한 맛이라니, 인생이 이렇게도 짤까 싶다. 숫제 간수 맛이다. 소금에서 빠진 간수나 사람 몸에서 새는 눈물이나 짜기는 마찬가지다. 눈물이 짠 이유를 생각한다. 눈으로 보는 게 좀 많음에랴. 세상의 온갖 슬픔과 잔인함, 선악善惡을 두루 담는 게 눈이다. 그것도 오십 년 넘게 보아온 터라 피곤하기도 하렷다. 그 모든 것들이 응축되었다면 눈물이 짤 수밖에, 시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한 구역에 위치해서인가. 콧속도 눈물처럼 느닷없기는 마찬가지다. 매운 걸 먹거나 찬 바람을 쐬면 콧속이 수증기에 들뜨는 주전자 뚜껑처럼 들썩거린다. 흘러나온 건 인중을 지나 입술까지 다다른다. 콧물을 콧속에 담고 있자니 자칫하면 목구멍으로 넘어갈 판이다. 눈물은 맑기라도 하련만 콧물은 같은 몸에서 나왔는데도 꺼림칙하다. 한정된 공간인 콧속에서 콧물은 가리산 지리산이다. 예전 아이들처럼 가슴에 손수건을 달아야 할 판이다.

새는 건 또 있다. 평상시 먹던 음식의 범주에서 벗어나면 여지없이 뒤가 불편하다. 가스의 역습이다. 소화기는 융통성이 없다. 음식의 질과 양을 적나라하게 알려 준다. 맵고 짜고 신 음식을 삼가라는 몸의 항변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경계를 넘는 가스는 느닷없음에 황당함까지 더한다. 자칫 참사를 부를 수 있는 슬픈 감탄사感歎詞를 품고 있다.

몸이 늙듯이 집도 늙어가고 있었다.

사람의 얼굴에 점이 생기고 피부가 거칠어지듯 집에도 곰팡이가 자라고 벽지는 거뭇해진다. 움직임을 마치고 끙하며 돌아누울 때 집도 뼈가 삭아 밤사이 뒤척이는 것일까. 바람과 햇볕을 맞은 외벽은 녹이 슬고 칠이 벗겨지고 부서진다. 내부도 마찬가지다. 사방으로 연결된 관들은 사람의 혈관처럼 때가 낀다. 문이며 미닫이도 온전치 못하다. 경첩이 느슨해지고 나사는 헛돌며 형광등은 깜박거린다.

세상은 어느새 꽃천지가 되었다.

지난겨울 움츠리고 있던 나무는 언제 저리 생생해졌을까. 어딘가에 푸른빛을 숨겨놓고 시침을 뚝 떼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야 한꺼번에 팡 터져버릴 수는 없다. 앙상했던 가지를 가득 채운 이파리는 여전히 동사로 팔랑인다. 지난해도 그랬고 그전에도 그랬고, 올해도 풍경 속 주인이다. 꽃이 피면 부사副詞와 형용사를 더해 완벽한 문장을 완성한다. 나무는 사람처럼 텍스트 자체가 아닌 문장의 의미다. 함축된 몸짓에는 어린 날이, 젊은 날이, 늙어갈 날이 모두 들어있다. 호들갑을 떨거나 요란스럽지 않게 서서히 스러져가는 나무를 보면 복잡한 구조를 가진 몸이 버겁다.

크게 아픈 적 없던 팔이 쑥쑥 아린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렇다고 온종일 아픈 것도 아니다. 어떤 특정한 동작을 하면 저릿한 느낌이 영 마뜩잖다. 분명 팔 어딘가 이상이 있긴 한데 감을 잡을 수 없다. 아련하게 스치는 아픔이다. 병원에 가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 스스로 진단한다.

몸의 변화가 느닷없이 하루를 불편하게 할 때, 흔들리는 건 몸인가 마음인가. 물방울 소리처럼 떨어지는 그 무엇이 온종일 가슴속에서 댕댕, 종을 치고 있다.

<좋은수필 2021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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