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두고/돌아가는 저녁/마음이 백짓장 같다./신호등 기다리다/길 위에/그냥 흰 종이 띠로/드러눕는다.
―고두현(1963∼ )

몸이 괴로우면 푹 쉬어주어야 한다. 그렇지만 마음이 괴로울 때, 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황망할 때, 슬플 때, 화가 치밀 때는 오히려 걸어야 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정신없이 걷고 있을 때 감정은 좀 가라앉는다. 빠른 걸음에 집중해서 괴로움을 잊어보려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다.

이럴 때 마주치는 횡단보도와 신호등은 결코 이롭지 않다. 그것들은 억지로 우리의 발길을 붙잡는다. 발길이 붙잡히면 마음도 붙잡히는 법, 괴로움은 이때다 싶어 다시 돌아온다. 횡단보도 앞에서 겨우 참았던 눈물은 터져 나오고, 겨우 멈췄던 생각도 봇물처럼 쏟아질 것이다.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고두현 시인의 ‘횡단보도’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시다. 이 작품은 걸음을 멈췄을 때, 마음이 마구 쏟아지던 어느 날을 우리에게 돌려준다. 속절없이 슬픔에 패배한 결과, 쓰러질 듯 서 있는 우리가 이 시 속에 있다. 심장을 다른 곳에 빼놓고 온 것처럼 가슴이 텅 비어버린 우리가 이 시 속에 있다.
 

 

시인의 경우에는 소중한 누군가를 남겨놓고 멀어지는 중이다. 횡단보도를 건넌다면 한 단계 더 멀어지는 느낌이 들겠다. 그래서 이곳은 넘어가기 싫은 마음과 넘어가야 하는 마음이 싸우는 격전지다. 그래서 횡단보도 흰 띠처럼 드러눕고 싶다고 시인은 썼다. 아마도 그는 되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초록불이 들어왔을 때 길을 건넜을 것이다. 그래도 알 수 있다. 시인의 영혼 한 자락은 그날, 그 횡단보도, 그 아스팔트 위에 남겨져 있을 것이다. 우리도 그랬으니까 이 횡단보도를 모를 수가 없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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