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불은 멀리 비추지 못했다. 작은 비눗방울처럼 내 몸을 감싸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런 불빛이 좋았다. 짚불은 한발 한발 어둠속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나를 지켜주는 동행자였다.
버스가 멈춰 섰다. 접시를 엎어놓은 듯 동그란 모자를 눌러쓴 안내양이 접이문이 밀쳤다. 뿌연 흙먼지가 찬바람에 묻혀 버스 안으로 몰려 들어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고개를 빼고 승강구문을 바라봤다. '제발'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내 바람과 달리 사람을 내려놓은 버스는 곧장 신작로를 달렸다.
나는 막차를 탈 때마다 우리 마을 사람이 있나, 그것도 아니면 같은 방향으로 가는 이웃마을 사람이나, 중간에 버스에 오르는 사람이 있지나 않을까. 주위를 살피다보니 어느새 버릇이 돼버렸다. 시골이라 얼굴생김새만보면 어느 동네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다행히 함께 갈 사람이 있으면 오늘밤은 마음 편히 밤길을 걸을 수 있겠구나. 미소를 짓게 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먼 산길을 나 혼자 걸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자꾸만 마음이 조급해져 왔다.
함께 길을 걸어왔던 두 사람이 나를 바라봤다.
"가겠나?"
그믐밤 혼자 길을 가야하는 내 모습이 안 돼 보였던지 걱정이 잔뜩 묻어 나는 목소리였다.
나는 대답 대신 꾸뻑 고개를 숙이며, 그들이 먼저 가기를 기다렸다.
두 사람은 나와 함께 막차를 타고 온 이웃마을 사람들이다. 잠시 동안 함께 길을 걸어왔었지만 이곳에서부터는 가는 방향이 달랐다. 나는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지만, 마음 같아서는 우리 집까지 바래다줄 수 없겠냐며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벅저벅 발자국소리가 어둠속으로 사라진 그들의 뒤를 좇았다. 어쩌지, 나는 주머니에 든 성냥갑을 만지작거리다 서둘러 주위를 살펴봤다. 어둠속에는 또 다른 어둠이 내려있었다. 더 진한 어둠, 나는 검은 물체를 바라보며 긴 숨을 토해냈다. 이젠 먼 길을 혼자서 갈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는 어둠속을 더듬었다. '부스럭' 손끝에 느껴지는 촉감에 잠시나마 앙다문 내 입술을 미소 짓게 했다. 나는 온기를 머금고 있는 볏짚을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힘을 써봤지만 꾹꾹 다져진 볏단이 쉬이 빠져 나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한 발을 짚동에 고정시키고 용을 썼다. 땅속 깊이 뿌리내린 우엉이 힘겹게 뽑혀져 올라오듯 볏짚이 손아귀에 잡혀 버둥질을 쳤다.
나는 빼낸 볏단에 바람이 잘 들지 않게 정강이로 다져 눌렸다. 두세 가닥 지푸라기로 볏단 중간 중간 매듭을 맸다. 허물 거리던 볏단이 단단해졌다. 마치 도깨비로 둔갑을 한 몽당비자루가 씨름이라도 한판 붙자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엉겨올 것만 같았다.
나는 볏단에 성냥불을 갖다 댔다. '사르르' 알곡이 떨어져나간 꽁지머리, 질끈 묶인 타래가 불꽃을 튀기며 화끈 타오르다 이내 붉은 빛을 땠다. 나는 짚불을 손에 든 채 신작로를 바라봤다. 길은 칠흑 같은 어둠에 묻혀 있었다.
홀로 걷는 길, 나는 길을 걸을 때 달빛이 훤하게 비추는 날이나, 한 낮인데도 먹구름이 잔뜩 내려 앉아 낮인지 밤인지 분간이 안 갈 때가 제일 무서웠다. 그런 날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허연 비닐만 봐도 기겁을 했다.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머리카락이 줏삣 하늘로 향해 서고 온 몸에 소름이 끼쳐왔다. 달빛이 내려앉은 비닐은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의 모습과 흡사했다. 분명 아침에는 없었었는데, 야시(여우)가 둔갑을 해서 나를 홀리려고 서있는 것은 아닐까 겁부터 났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에는 외다리 도깨비가 버티고 서 있는 것처럼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무엇이던 분명하게 보이면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지만, 그렇잖아도 으스스한 기분에 사로잡혀 길을 재촉하고 있을 때, 저만치 앞서 희미한 물체가 눈을 어지럽혀올 때면 별놈의 생각이 다 들었다.
나는 발소리가 울리지 않게 뒤꿈치를 땅에 대는 듯 마는 듯 발을 내디뎠다. 밤길을 자주 걷다보니 차라리 달빛도 별빛도 없는 캄캄한 밤이 오히려 덜 무서웠다.
짚불을 손에든 나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서둘지 않아도 어둠은 내 손에 든 작은 불 앞에 삼킨 길을 토해 놓을 테니까. 사박사박 발끝에서 울려오는 발자국소리, 나는 어둠의 짓궂은 성질을 잘 알고 있다. 내가 혹시라도 겁을 집어먹는 날엔 어둠은 나마저 집어 삼킨다는 것을. 그동안 나는 어둠이 삼켜버린 이 길을 걸으며 수없이 경험했었다.
초등학교 하굣길, 한줄기 소나기라도 내리려는지 검은 먹구름이 서산마루에 몰려들었다. 서산에 먹구름이 끼면 한 번도 곱게 지나간 적이 없었다. 더구나 오늘은 다른 날과 달랐다. 가물치 대가리 같은 검은 먹구름이 긴 꼬리를 내려놓으며 서산 허리를 휘감고 있었다. 돌고 있는 꼬락서니를 보니 작년 백중날보다 더 할 것 같았다.
백중날, 나는 소꼬리에 귀신이 붙을까봐 해가 많이 남아 있을 때 소를 몰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들판을 가로질러 신작로로 접어들 때, 멀쩡하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져왔다. 검은 염색물이 하얀 광목을 물들이 듯, 서산마루에 몰려든 먹구름이 청청하늘을 순식간에 검게 물들였다. '번쩍' 번개가 치고 '콰르릉' 먹구름위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소꼬리에 귀신이 붙으면 어쩌나. 어린 마음에 덜컹 겁이 났다. '이럇' 나는 소꼬리를 말아 잡고 한손에 잡고 있던 소이까리로 소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날은 함께 달릴 소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나 혼자였다. 나는 잔뜩 겁을 집어먹고 달리고 또 달렸다. 헉헉, 숨이 모가지에 차오를 쯤 매캐한 흙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뛰면서 뒤를 돌아봤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굵은 빗줄기가 내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쏴, 우두두. 내 뒤를 쫓아오는 폭풍우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 그 모습은 가끔 꿈에서 본 악귀의 모습과 흡사했다. 뚜렷한 형체도 없는 악귀는, 내가 아무리 꼭꼭 숨어도 찾아냈고. 죽을힘을 다해 달렸지만 결국 나는 악귀에게 잡히고 말았었다.
차라리 꿈이었더라면 그 순간 잠에서 깨어났을 텐데, 나는 폭풍우 속을 달리고 또 달렸다. 달그락 달그락, 어깨에 훌쳐 멘 책보자기에서 울려오던 필통속의 연필소리가. '달각달각' 겁에 잔뜩 질려 뛰고 있는 심장의 박동소리처럼 빠르게 울려왔다. 두려움에 그림자마저 숨어버린 신작로엔 저벅저벅 쿵쿵, 덤을 울리는 내 발자국소리가 악귀의 악다구니처럼 들려왔다.
발갛게 불빛을 토해내던 짚불이 사거라 들고 있었다. 볏단에 쉬이 바람이 들까. 조신조신 사대부집 고명딸을 단속하듯 너무 틀어잡은 것이다. 나는 양손으로 볏단을 감싸 잡고 '후' 깊이 빨아들인 숨을 내불었다. 하지만 불씨는 살아나지 않았다. 아직 갈 길이 멀었는데, 길을 밝혀줄 불이 없으면 내 처지는 지팡이를 잃어버린 소경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몇 번을 그러다 볏단을 잡은 팔을 빙빙 돌렸다. 꺼져가는 불씨에 숨통이 틔었는지 깔딱거리던 볏단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나는 쉬지 않고 팔을 돌렸다. 빛을 잃어가던 짚불이 어둠속에 다시 되살아났다. 벌겋게 빛을 머금은 짚불이 둥그런 원을 그리다 활활 불꽃을 피웠다.
달마저 숨어버린 캄캄한 밤, 어둠을 몰아내기에는 너무나 미미한, 작은 찌름에도 금세 터뜨려지고 말 비눗방울 같은 존재에 불과 했지만, 내손에는 늘 작은 불덩이가 들려져 있었다. 나는 짚불을 볼 때마다 수줍어 고개 숙인 열여덟 처자의 볼을 생각했다. 볼그스름 불을 머금고 있는 짚불에 시선을 내려놓으면 어둠의 그림자는 저만치 물러가고, 두려움이 머물렀던 그 자리에는 어느새 사랑스런 처자의 아득한 그리움으로 채워졌다. 부끄러워 한 번도 고백하지는 못했지만. 이심전심, 수줍어 얼굴 붉힌 그녀를 생각하면 언 손이 따듯해져오고, 옷깃을 파고드는 찬바람에 쌍그렇게 식어가던 가슴이 아랫목을 파고드는 것 같이 따듯해져왔다.
나잡아 봐라. 뒤를 쫓다보면 그녀의 붉힌 볼이 화끈 내손을 훑고 지나갔다.
'앗 뜨거' 정신을 차리면 내 손에는 호미자루 같은, 몸을 태우고 있는 짚불이 들려 있었고, 어느새 나는 고향집 삽짝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