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목의 변() / 이은희

 

 

 

고사목이 눈에 든다금방이라도 연둣빛 신록에 묻혀 나무줄기 여기저기에서 푸른 잎이 돋아날 것만 같다구병산 팔백여미터 산길을 오르는 중에 만난 허옇게 말라버린 소나무꽃 빛바랜 화석 같다몸체가 굵고 하얘서 유난히 도드라진다시선은 나무의 줄기를 따라 하늘을 바라보지만신록에 가려 우듬지가 보이지 않는다.

고사목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자니 뜬금없이 '군중 속의 고독'이란 낱말이 뇌리를 스친다혹여 이 나무가 바로 '고독의 실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다다른다고독도 깊으면 병이 되고관계 또한 과하면 탈이 나지 않던가저 많은 나무 중에 누구와도 소통이 어려워 지쳐버린 나무인가주변의 수종을 살펴보니 대부분 활엽수종이다참나무와 아기단풍산진달래 등속이다그 속에 죽은 나무는 소나무 한 그루뿐이다.

죽은 나무를 바라보는 이마다 해석을 달리하리라나무의 사인을 물어보지 말자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빈곤이 드러나듯빈곤의 뒷면에는 풍요가 득세하고 있지 않던가봄빛의 향연이 벌어지는 숲 속이다연둣빛으로 물든 갖가지 나무들과 연분홍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그 자체만으로도 환상적이다나무의 껍질은 벗겨지고 맨살로 반짝이는 소나무바로 풍요 속 빈곤의 실체가 아닐까 싶다.

의미 찾기를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이나 그리 생각할지도 모른다나와 함께 나선 여인네는 죽은 소나무는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산중에 흐드러진 산진달래 꽃에 홀려 감탄하느라 여념이 없다산 밑에서 몰려오는 알록달록 차려입은 등산가들 또한 고사목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산 정상을 향하여 빠르게 오른다.

고사목이 살아 있다고 믿고 싶다이렇게 기품이 넘치는 나무를 어디에서 만나랴주위 나무들을 보자나무 굵기로 보나 자태를 보나 아마도 살아 있을 때 주위 사무들의 시선을 독차지했을 것 같다푸름 속에서도 고사목으로 기죽지 않을 늠름한 자태가 그 증거이다.

어찌 보면빈곤의 실체는 고사목이 아닌 나와 주변의 것들이다위로를 받고자 숲에 든 내가 아닌가빈약한 사색과 관찰로 나무가 안타깝다고 애잔한 눈길을 보낸 건 잘못이다고사목은 고독의 달인이자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베푸는 자선가다그의 몸집엔 벌레나 곤충들이 헤집어 놓아 크고 작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나무는 죽어서도 공덕을 쌓는다뚫린 공간에서 실체 없는 바람도 쉬어가리라그의 몸을 빌린 자들도 그에 폭넓은 아량과 베풂을 알까나처럼 미욱하여 머문 공간만 바라보고 내면을 읽지 못한 탓이다.

나무는 남다른 고독을 꿈꾸고 있다하늘을 향하여 멋스러운 자태로 서 있는 나무고사목으로 꺾이지 않는 늘 푸른 소나무로아니 쓰러지지 않는 화석으로 숲 속에 늘름한 모습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순간 줄기마다 솔잎이 무수히 돋아 성성한 나무로 주변 나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새봄은 마술을 부린 양 나의 눈에 콩깍지를 씌운다멀쩡한 사람도 마구 흔들어 놓는 봄날의 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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