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바탕에 새빨간 숫자 ‘37.2’가 시선을 붙든다. 사람 발길이 뜸한 거리에 지하 카페 간판이 우뚝 서 있다. 그 옆에 영화 <베티 블루 37.2>의 ‘남자와 여자, 사람의 마음이 움직인다.’로 시작하는 설명글이 재미있다. 사랑이 꽃피는 절정의 순간에 우리 몸은 37.2가 된다고 한다.
사랑의 열병으로 몸이 뜨거워지는가. 주인공 베티처럼 모든 것을 걸고 하는 사랑,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러했으리라. 그들에게 깃든 불안하고도 위험한 온도는 오래도록 이어졌을 것이다. 주인장이 카페 이름을 ‘37.2’로 정한 까닭을 헤아려본다. 여기에 오면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고 넌지시 암시하는 듯하다.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안개처럼 스며든다. 사람이란 누군가가 바라보아 줄 때 안도하게 되는 걸까. 연인의 어디가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묻는 말에 대다수가 눈이라고 했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을 보고 서로 눈이 맞았다고 하는 모양이다. 혹자는 눈멀고 귀기 멀어야 열리는 사랑을 질병의 일종으로 여기기도 했다. 할 수 없는 끌림, 통제할 수 없는 감정에 이끌리다 보면 분간이 흐려지기 때문이리라.
수십 년 지기인 H와 찻집에서 마주 앉았다. 그녀는 전형적인 현모양처형이다. 늦은 공부를 하면서 새로운 사람들과도 종종 어울렸는데, 인사를 나눌 때면 습관처럼 잡는 남자와도 얼굴을 트고 지냈다. 몇 번의 만남이 이어지던 어느 날, 남자는 옆자리에 앉은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동석한 사람들과 기나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일이라고 했다.
평소라면 냉큼 손을 뿌리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텐데 다소곳이 머물렀다는 것이다. 동행한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가 이끄는 대로 어디든 순순히 따라갔을지도 모른다고 해 내 눈이 뚱그래졌다. 당시의 감정이 되살아나는지 그녀의 크고 검은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그런 짧은 설렘도 사랑이었을까.
흔히 여자를 꽃으로, 남자는 벌과 나비로 비유된다. 우주 만물이 그렇듯 음양의 이치가 서로를 끌어당긴다. 꽃은 향기와 모양새로 나비를 유혹하고, 나비는 꿀과 향을 취하려 이 꽃 저 꽃 자유로이 누비고 다닌다. 인생은 크고 작은 갈등과 선택의 연속이다. 지고지순한 사랑을 강조하던 단테도 끊임없는 갈등을 겪었을 터이다.
아래층에 살던 예쁘장한 새댁이 생각난다. 남자는 허우대가 멀쩡했으나 밥벌이를 나가는 걸 보지 못했다. 매일같이 그 집 앞에 빈 술병들이 쌓여 있었다. 부부싸움을 하는 날은 간혹 구급차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새댁의 기척이 며칠 없던 하루는 낯선 여자가 그 집에 들락거렸다. 딸을 키우는 심정은 새댁이 신경 쓰였지만 아는 체 할 수가 없었다.
이사 가던 날 인사하러 내려갔더니 새댁이 수척한 얼굴로 혼자 있었다. 남편은 지난주 병원에 입원했단다. 알콜 중독으로 건강에 이상 신호가 올 때면 입원했었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왜 그렇게 사느냐고, 차라리 어디 멀리 가서 혼자 마음 편히 지내라고 일렀다. 새댁은 눈가가 붉어졌다. 내가 떠나면 불쌍한 저 사람은 누구를 의지하고 사느냐며 울먹였다. 몇 달 후 시장가는 길모퉁이에서 먼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차분한 모습을 하고 국화빵을 뒤집고 있었다.
우리는 사랑의 얼굴이 여럿이란 걸 세월이 한참 지난 다음에야 알게 된다. 봄밤의 꿈같은 달콤한 사랑도 끝내 직수굿한 그리움을 남기고 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마음의 방안에 두고 살아갈 힘을 얻으려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