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백석은 <통영>이라는 제목으로 세 편의 시를 썼다. 평안도 정주 출신인 그가 같은 제목으로 시를 여러 편 발표했다는 것은 그만큼 통영에 대한 인상이 깊었기 때문이다.
1936년 1월 백석은 친구 신현중과 함께 통영을 찾아간다. 지금이야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통영에 곧바로 닿지만, 그 당시에는 경부선 철도를 타고 삼랑진역을 거쳐 마산에서 배를 타고 어렵게 들어가야 했다. 백석은 짝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고 싶었다. 이화고녀에 다니던 박경란이 방학이어서 고향 집에 내려와 있었던 것. 그녀의 집은 명정동에 있었지만 백석의 간절한 꿈은 이뤄지지 않는다. “난이라는 이는 명정골에 산다는데 / (…) /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라며 충렬사 돌계단에 주저앉아서 한탄한다. 이 시와 백석의 산문에 등장하는 ‘난(蘭)’이 바로 박경란을 가리킨다. 그녀는 백석의 구애에도 불구하고 외사촌 서병직에게 손님 대접을 부탁하고 나타나지 않는다.
훗날 백석은 연작시 <남행시초> 안에 또 <통영>이라는 소제목의 시를 쓴다. 시의 말미에 ‘서병직씨에게’라는 말을 붙여놓은 것은 통영 여행의 안내자에게 감사를 표시한 것. 백석은 통영 시편들에서 당시 통영의 풍경과 풍물과 역사를 매우 치밀하면서도 애틋하게 묘사한다.
그때 그는 “어느 오랜 객주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술을 마신 이튿날, 새벽 서호시장에 가서 ‘시락국’을 먹었을 것이다.
옛적부터 이름난 소리꾼들은 여름에 깊은 산속을 찾아가 판소리를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배웠다. 이를 ‘산공부’라고 한다. 그것은 득음을 위한 독공(獨功)의 시간이었고, 선생과 제자가 함께 먹고 자며 훈련하는 혹독한 ‘여름 켐프’였다. 길게는 여름 한철 100일을 꼬박 산에서 보내기도 했다. ‘신창(神唱)’으로 부르는 명창 권삼득과 완주의 위봉폭포, 이중선과 부안의 직소폭포, 정정렬과 익산 심곡사 등이 산공부의 일화로 우명하다.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소리를 내지려면 외따로 떨어진 암자나 움막집만큼 적당한 곳이 없다. 폭포를 끼고 있는 계곡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안성맞춤. 만물의 생기와 활력이 충만한 여름에 산속에서 연습을 하다 보면 밖으로 내지른 만큼 안으로 빨아들이는 것이 있을 터. 그리하여 산공부는 자신과의 싸움이면서 크게는 우주와 대결을 벌이는 것.
하루 세끼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선생의 입과 모양과 몸을 바라보며 공부에 매진해야 한다. 선생의 호통과 매를 견뎌야 할 때도 있다. 이 과정에서 제자들은 선생의 소리만 배우는 게 아니다. 선생의 숨소리, 몸짓, 버릇, 취향을 모두 빨아들이는 것. 몸이 무기인 소리꾼들은 산공부를 통해 선생의 전부를 배우는 것이다.
소리꾼들의 이러한 집중과 몰두를 나는 다른 예술 장르에서 보지 못했다. 비록 산중은 아니었지만 국악과 개인 연습실에서 이뤄지는 소리꾼들의 산공부를 잠깐 엿본 적 있다.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