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꾼 친구가 검정 고무신을 보내왔다. 고무신 콧등에 분홍색 복사꽃이 피었다. 꽃을 더하자 거무스름한 고무신이 활짝 살아난다. 점점이 찍힌 붉은 꽃술로 살랑살랑 나비가 날아들겠다.
가지 끝에 물이 오른 삼월삼진날, 옛 여인들은 곱게 단장하고 들로 산으로 나갔다. 봄 마중 모꼬지는 개울가 아늑한 곳에서 벌어졌다. 돌을 고여 화덕을 만들고 그 위에 손뚜껑을 걸었다. 방금 딴 진달래로 전을 부치면 이야기꽃도 피어올랐다. 입 안 가득 봄 향기가 차오르고 여인들 볼에도 꽃물이 들었다.
동네 앞산에 참꽃이 피면 봄이 온 줄 알았다. 가지마다 꽃망울들을 팡팡 터트렸다. 엄마는 참꽃 흐드러진 산으로 나를 데리고 다녔다. 꽃잎을 따는 당신 치마꼬리를 잡고 입술이 퍼렇도록 따먹었다. 꽃무더기 옆에 선 당신이 예쁜 우리 딸, 잘 되라는 주문과 함께 내 미리 위로 꽃잎을 흩뿌려 주면 기분이 좋았다.
엄마는 꺾어온 진달래를 빈 병에 꽂았다. 그러고는 따온 꽃은 수술을 떼고 찬물에 살살 씻어 물기를 닦았다. 찹쌀가루를 익반죽한 다음, 달군 팬에 참기름을 두르고 동글납작하게 빚은 반죽을 은근하게 지졌다. 가장자리가 투명하게 익으면 하나하나 뒤집어 진달래 한 잎씩 올렸다. 밍밍한 여백에 붉은 꽃잎이 생기가 돌았다. 다 익은 부꾸미를 접시에 담아 꿀을 뿌렸다. 설렘으로 한 입 베어 물면 달콤하고 고소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그렇게 봄을 먹고 나면 내 가슴도 부풀어 올랐다.
귀뚜라미 소리가 귓전을 울리면 집집마다 창호지를 갈았다. 구멍이 숭숭 난 헌 문종이에 물을 흠씬 뿌려서 말끔히 뜯어낸 뒤, 뼈만 앙상한 문살에 창호지를 붙였다. 엄마는 백색 일색의 밋밋한 문을 그냥 두지 않고, 문고리 주변에 꽃수를 놓았다. 미리 말려둔 담홍색 부용꽃이나 국화꽃을 넣고 그 위에 종이를 덧발랐다.
한결 화사해진 방안에 국화 향이 그윽했다. 산에 들에 피는 꽃이 우리 문에도 빨갛게 노랗게 피었다. 햇살이 쏟아지는 낮에도 달빛이 유난할 때도 꽃무늬가 은은하게 비쳤다. 겨울바람에 문풍지가 흔들려도 방안은 꽃피는 계절인 듯 착각이 들었다. 꽃을 보면 마음이 환해졌다. 문에 바투 다가앉아 꽃잎을 들여다보면 엄마의 바램처럼 난연한 빛이 나를 감싸 안았다.
여자는 분성적으로 꽃밭, 자궁을 안고 태어난다. 자연의 자궁인 꽃도 안개와 이슬과 햇빛으로 생명의 씨앗을 키우는 공간이다. 이름 없는 들꽃도 자신을 드러내어 뭇시선에 봄빛을 선사한다. 돌 틈이든 벼랑 끝이든 척박한 그 어디에서도 꽃을 피운다.
꽃은 절정이요, 열매는 완성이다. 씨앗은 혹독한 겨울을 안간힘으로 이겨내 싹을 틔우는 순간부터 대지를 향해 뿌리를 뻗는다. 온갖 혼돈의 시간을 홀로 삭이고 다독인다. 해를 맞고 달빛을 먹고 별빛을 마시며 꽃봉오리를 얻는다. 활짝 핀 꽃이 절정에 이르면 마침내 열매로 완성된다. 토실토실한 알밤도 달콤한 사과도 꽃으로부터 온 것이다.
내게도 꽃다운 나이가 있었다. 가슴에 소망을 간직하며 꿈을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그러나 결혼하고 아리를 키우고 자곡을 챙기면서 이울어져 갔다. 내 이름을 잊고 살다 보니 지금은 내가 꽃이었나 싶다. 한 걸음씩 나아가고 싶었지만 도돌이표가 제자리를 맴돌았다. 뒤를 돌아볼 무렵, 이이들마저 품 안을 벗어나 제 갈 길을 찾아갔다.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것처럼 공허해졌다. 무엇으로라도 빈 마음을 메워야 할 것 같았다.
은행잎이 노랗게 깔린 거리를 무작정 걷다가 도서관 앞에 멈추어 섰다. 처음엔 시간이나 때울까 싶었다. 읽을 책을 고르며 깨금발로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사각사각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릴 뿐, 다들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학문에서 진리를 캐는 젊은이들, 자신의 삶을 발효시키려는 중년들, 황혼녘에도 글밭을 일구는 노년들…. 마음 둘 데 없는 나는 거리를 배회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저마다의 길을 내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서관에 한 자리 끼어들었다. 시집이든 소설이든 잡히는 대로 읽었다. 한 줄 두 줄 기발한 언어들을 주워 적바림하다 보니, 눌러두었던 감성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자음과 모음의 어울림을 종이 위에 쓰다 보면 메마른 감성의 가지에 물이 올랐다. 마음에 다시 남풍이 불어오고 있었다.
꽃달임은 마음을 달래는 의식고 같다. 사람들은 희멀건 쟁반에 꽃을 그려 넣고, 무명천에, 뽀얀 쌀강정에 심지어 손톱에도 고운 꽃을 놓는다. 어떤 화가는 수백 여인의 머리에 화사한 꽃숭어리를 달아 고단한 영혼을 달래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친구가 선물한 검정 고무신도 시들어가는 나를 달래는 꽃달임에 다름없다.
생의 가을에 접어들었다. 한 달에 한 번 피던 꽃도 피지 않는다. 푸른 날의 순간순간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고이 간직되어 있다. 몸은 이울었지만 마음은 다시 한 번 꽃으로 피어나고 싶다. 내 인생의 글꽃을 피우기 위해 온밤을 꽃몸살 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