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예닐곱 살이나 되었을까. 낯익은 마당 한가운데에 어린 내가 서 있다. 곁에는 길두 아재가 닭에게 모이를 던지다 말고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짓고 있다. 닭들의 부산한 날갯짓 소리도 들려오는 듯하다.
어린 시절을 외가와 친가를 번갈아 가며 보냈다. 두메산골 외딴집, 외가에는 이모들과 외삼촌이 모두 객지로 떠나고 할머니와 길두 아재만 살았다. 외할머니의 친가붙이였던 아재는 나의 아버지와 나이가 같았지만 내가 열 살이 다 되도록 장가를 들지 않고 외가에서 막서리로 지냈다. 길쭉한 얼굴에 숯덩이 같던 눈썹, 도탑던 목소리는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아재는 사람 좋은 물신선이었다. 특히 내게는 넨다했다.* 그런 아재가 물썽해보였던지 나는 나쎄가 먹도록 떼꾸러기 노릇을 해서 어디를 갈 때면 아재 등에 업혀서 갔다.
음력 시월 열이레, 어머니의 외할아버지 제삿날. 나의 외가에서 어머니의 외가가 있는 연오까지 이십 리가 넘는 산길을 외할머니와 아재는 바람만바람만 하며 갔다. 앞서 걷는 외할머니의 머리 위에는 정성스레 쪄낸 민어 광주리가, 허리춤에는 들기름에 노릇노릇하게 지진 국화전 소쿠리가 들려 있었다. 아재가 진 바지게 안에는 제사상에 올릴 몇 됫박의 햅쌀과 그해 과수원에서 수확한 제일 잘 여문 조조리 배와 국광 몇 개가 실렸다. 외할머니가 지어준 솜 넣은 포플린 치마저고리를 입고서 나도 바지게에 제물처럼 담겨 발맘발맘 고개를 넘어갔다.
무서리가 내리는 밤이었다. 보름을 갓 지난달은 거울 속 같았다. 상강을 지난 때여서 들녘엔 채 거두지 않은 서속과 수수들이 무거운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돌감나무와 산수유, 산사나무의 붉은 열매들이 달빛에 얼굴을 씻는 소리가 났다. 산국 향이 짙었다. 때론 여우가 나타난다고 하여 ‘여시 고개’라 고도 불리던 말티 고갯길. 고개 모롱이엔 돌아가시기 전 외증조할아버지의 수염을 닮은 억새가 늦가을 밤을 근엄한 빛으로 흔들었다.
억새밭을 지나면 환삼 덩굴밭이었다. 괴기스러운 느낌으로 헝클어져 있던 마른 넝쿨이 아재의 바짓가랑이를 와락 끌어당길 것만 같았다. 평소에는 아재처럼 다정하기만 하던 상수리나무도 그날엔 가량없는 몸짓으로 나 몰라라 하늘만 바라고 섰다가는 가분재기 여우 울음까지 불러들였다.
“워이리 휘……. 위이리 위…….”
내 팔이 아재의 목을 끌어안으면 웬일인지 아재도 몇 번 헛기침을 했다. 그러면 대답이라도 하듯 저편에서 다시 여우 소리가 들려왔다.
“켁! 케겍! 휘이…….”
이번엔 앞서 걷던 메리 녀석이 거들었다.
“컹! 컹!”
그러면 여우는 한층 앙칼진 음성으로 대꾸질을 해댔다. 사위스러운 소리에 천지가 얼어붙는 듯했다. 깜빡이던 별조차 하늘에 박혀버린 듯 꼼짝 않았다. 휙, 하고 바람이 지날 때마다 금세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아재가 밟는 낙엽 소리에 가슴이 졸아들었다. 바로 앞 참나무 숲에서 수리부엉이 한 마리가 우리를 쏘아보고 있었다. 노란 눈망울에서 뿜어 나오는 빛이 어찌나 무섭던지 메리도 걸음을 딱 멈추고서는 휘둥그레 아재를 올려다보았다. 걱실걱실하던 아재도 무서웠던 모양이다. 고개를 돌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자야, 자나?”
“…….”
대답 대신 나는 도꼬마리처럼 바지게 속을 파고들었다. 아재의 헛기침 소리가 더 낮게 들려 왔다. 깜빡 잠이 들었던가 보다. 아재의 등은 세상보다 너른 꿈 밭이었다. 육이오 전쟁통에 집을 나선 후 돌아오지 않았다던 외할아버지와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러 서울로 떠난 외삼촌과 시집간 후 한 번도 다녀가지 않았다던 그리운 셋째 이모도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었다.
왁자한 소리에 잠을 깼다. 나는 빈 능금 소쿠리처럼 방 한쪽 구석에 밀쳐져 누워 있었다. 어른들의 등이 병풍처럼 가리고 있어서 방 안은 어두컴컴했다. 제사를 끝내고 음식을 먹고 있는 것 같았다. 고소한 산적과 어적 내음이 진동했다. 꼴깍, 도리깨침 삼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장지문 건너에서 들려오는 아이들 소리에 나도 일어나야겠다, 하고 있는데 누군가 아재를 불렀다.
“길두야, 가을걷이를 끝내는 대로 어푼 집으로 오니라. 올케는 꼭 혼례식을 올리야 한대이.”
몸을 일으키려다가 말았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에게 잊힌 채 혼자 쫄쫄 굶고 있는 것이 서러웠던 걸까. 그토록 고소하던 음식 냄새도, 아이들의 장난 소리도 다 사라져버렸다. 훌쩍이는 소리를 들킬까 봐 방바닥에 얼굴을 묻고 울다가 다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또 꿈을 꾸었다. 사모관대를 한 길두 아재가 말을 타고 고샅을 빠져나가는 꿈이었다. 꽃가마 한 대도 따르고 있었다. 달음박질을 해보았지만 한 발짝도 뗄 수 없었다. 아재는 언제나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갔다. 꿈인 듯 생시인 듯 “흑흑!” 소리가 내 귀에 또렷하게 들려 왔을 때였다. 아재가 나를 깨웠다.
“자야! 자야! 와 우노?”
눈꺼풀 속에서 빛이 환했다. 설핏 실눈을 떴을 때 하마터면 고함을 지를 뻔했다. 갑자기 추워진 탓이었을까. 된서리가 무더기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온 세상이 은빛이었다. 나는 또 바지게에 담겨서 외가로 돌아가고 있었다. 멀리 외가가 보였다. 뒤꼍 대숲도, 아재가 목말을 태워 올려주던 감나무도, 마당도 꿈결인 듯 고요했다. 여우도 부엉이도 잠에 빠진 듯 산길엔 “싸락싸락” 갈잎에 서릿발 부딪는 소리만 났다.
오늘 밤에도 무서리가 내린다. 서랍 속 사진을 꺼내어 본다. 뚜벅뚜벅 시간을 걸어 나온 길두 아재가 그날처럼 나를 깨운다.
“자야! 니, 또 와 우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