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두각시놀음하던 인형이 줄을 끊었다. 조종자의 손가락과 제 팔다리 사이에 연결된 줄을 스스로 자르고 무대 아래로 추락했다. 약탕기가 땅에 떨어져 깨어지면 그 안에 든 보약은 한낱 오수(汚水)에 지나지 않듯이 추락한 인형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새로운 인형이 등장하여 놀음을 이어간다.
‘인생은 한 편의 연극’이라는 말이 있다. 세상은 신이 쓴 희곡이 상연되는 무대, 인생은 한 편의 연극, 그리고 인간은 배역을 맡은 배우라는 말이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신의 각본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갓난아이의 무대는 엄마의 봉긋한 두 젖무덤이다. 엄마 품 안에만 있으면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다. 아이는 제힘으로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일어서면서부터 생활 반경을 넓혀 나간다. 자립自立을 위해 무대를 직접 만들었다가 부수기도 하면서 점점 더 큰 무대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다 무대 한복판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공룡이 되어 버린 자기 곁에는 가족도 친구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팔과 다리는 이미 보이지 않는 줄에 매달려 있다.
자립은 자유를 전제로 하는데, 자유는 경제적으로 자립을 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사람은 제각기 자기가 먹을 감자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감자를 심고 키우고 거두는 것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그런데 자기의 능력을 지나쳐 남의 곳간을 넘보거나 이웃 밭에 있는 감자까지 탐을 내니 문제다. 인생이라는 연극의 역할을 탐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흔히 자리에 걸맞지 않은 사람이 높은 의자에 앉으면 두 가지 행태를 보인다. 하나는 자리에 맞춰 스스로 향상하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그 자리에 취해 정신을 놓아 버리는 경우다. 전자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훌륭한 성과를 낸다. 후자이면 공적은 고사하고 화려한 껍질에 취한 배우만 남는다. 본질인 ‘자아’와 배우인 ‘타자’의 구분이 안 되다 보니 ‘진실한 삶’은 설 자리가 없어지고 ‘보여주기 위한 삶’만 남는다. 본연의 자아를 잃어버린 그는 텅 빈 바닷가에서 허망한 모래성 쌓기에 열중한다.
그도 처음부터 이런 결과를 바라지 않았다. 주체적인 사고와 절제된 행동으로 즐겁고 자유로운 삶을 원했다. 그러나 분에 넘치는 감자를 탐하고 더 넓고 큰 무대를 좇다 보니 저도 모르게 자유와 자립에서 멀어졌다. 보람과 행복은 멀리 가버리고, 왼쪽 가슴에 공인公人이라는 주홍색 이름표 하나만 나부낀다.
이제는 처음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손뼉 치고 환호하는 수많은 관객이 자기를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자의 반 타의 반이 아니라, 앞으로 위로 떠미는 타의他意만 존재하는 환경과 본연의 자기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괴리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 관객과 마주 선 앞모습만 신경 쓰고 무대에서 내려와 혼자 대기실로 걸어갈 구부정한 등은 생각하지 않은 탓이다.
서울시 행정을 책임진 분의 극단적인 선택이 온 나라를 충격에 빠뜨렸다. 연극을 끝까지 마무리하지 않고 스스로 팔다리에 묶인 줄을 끊었다. 그분 외에도 오천만 국민의 삶을 보살피던 분, 천만 시민의 살림살이를 챙기던 분, 스크린을 통해 수백만 관객을 울리고 웃겼던 주인공도 줄을 놓아 버렸다.
그러나 연극에는 주연 배우만 있는 것이 아니다. 6세기 이탈리아에서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라는 새로운 연극의 형태가 탄생했다. 그 당시에 관객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캐릭터가 바로 할리퀸과 피에로, 스카라무슈와 메제티노※였다.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이 캐릭터들은 극 중의 감초 역할을 하는 조연이었다.
무대에 올린 연극마다 흥행에 성공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배우가 어찌 조그만 흠이나 실수가 없겠는가. 한 번의 실수에 실망한 나머지 무대를 박차고 뛰어나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배우가 설 무대는 얼마든지 있다. 지금의 무대에서 내려와 다른 무대에서 또 다른 역할을 맡을 기회가 많다. 새로운 무대가 반드시 크고 화려한 무대일 필요는 없다. 작다고 좋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서만 큰 무대를 독차지하고, 주연을 도맡을 수는 없지 않은가.
당나라의 임제 선사가 쓴 임제록臨濟錄은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 지금 있는 그곳이 바로 진리(隨處作主 立處皆眞; 수처작주 입처개진)라고 가르친다. 자기가 처한 곳에서 주체성을 갖고 전심전력을 다 하는 것이 바로 진실한 삶이란 뜻일 것이다. 요즈음 연극영화계에서 조연 배우가 각광을 받거나 농구의 식스맨 역할에 주목하는 현상은 임제 선사의 시선으로 보면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연극 같은 인생, 아니 인생은 연극이다. 그들을 믿고 따르며 손뼉 쳤던 국민, 시민, 관객은 허탈하기 짝이 없다.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이 있더라도 국가와 민족, 예술을 위해 쌓아 올렸던 그 간의 족적을 잘 마무리하고 피날레를 장식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셰익스피어도 ‘명예란 허무한 군더더기다. 공로가 없어도 때로는 수중에 들어오지만, 죄를 안 지어도 없어질 때가 있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거나 부유한 삶을 누리는 사람에게 무한대의 자유까지 허용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절제와 극기가 몇 배나 더 필요하다는 점을 진작 알아차렸더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들은 갑남을녀 역할을 맡은 여느 인형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에게 보여 줄 것이 아직 많이 남은, 스스로 줄을 끊어서는 안 될 큰 역할을 맡은 분들이어서 더욱더 안타깝다.
사진첩을 뒤적이다 큰아이가 유치원에서 운동회 하는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아이들이 단체로 꼭두각시 춤을 추고 있다. 17현 가야금과 국악 관현악이 어우러진 꼭두각시 가락이 확성기를 통해 들리는 듯하다. 흰 바지저고리에 받쳐 입은 큰아이의 파란 조끼가 잘 어울린다. 색동저고리에 흰 치마를 입은 여자아이와 두 손을 맞잡고 웃고 있는 두 아이 얼굴이 더없이 맑다. 꼭두각시 춤과 가락을 즐기면서도 어른처럼 줄에 매이지 않은 천연함이 만들어 내는 환한 웃음이다.
과거는 내 연극의 리허설이고, 오늘은 내 연극의 본무대이며, 미래는 내 연극의 시나리오라는 말이 있다. 주어진 연극을 얼마나 재미있고 유익하게 만들지는 주인공인 나에게 달려 있다. 그러니 미래의 멋진 무대를 위해 리허설을 참고하여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시나리오를 고쳐 나가면 그만이다. 한 가지 대본만 있는 인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인생이 한 편의 연극이라면 모름지기 한바탕 웃음으로, 아이들처럼 신나게 꼭두각시 춤 한번 추고 무대에서 내려올 일이다. 그가 주연이었던 연극을 보아준 관객들을 위해서라도 가벼이 체념하고 줄을 끊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리고 줄을 놓아서는 안 될 훨씬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를 배우가 아닌 아버지/어머니/아들/딸로 사랑하는 가족이 있지 않은가.
※ 꼭두각시: 민속 인형극 「박 첨지 놀음」에 나오는 여자 인형.
※ 할리퀸, 피에로, 스카라무슈와 메제티노: 코메디아 델라르테에 자주 등장하는 등장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