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교수가 e메일로 동영상을 하나 보내왔다. 제목이 감동의 동영상이라 되어 있다. 궁금했다. 얼마나 감동적이기에 감동이란 수식어까지 붙였을까.
파일을 열었다. 젊은 청년이 화면에 나온다. 노래를 부르는 무대다. 그런데 노래를 하기 전에 심사위원이 질문을 한다. 그의 대답이 놀랍다. 아니 너무 슬프고 안타까워 들을 수가 없다. 요즘 같은 때에도 저렇게 어려움을 겪고 산 젊은이가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심사위원도 방청석의 사람들도 나도 그의 아픔 절망 슬픔에 전염이 되어 눈물을 쏟았다. 정작 그는 울지 않는데 그를 보는 모두는 하나같이 울고 있다. 그가 노래를 한다. 첫 일성이 터지는 순간 사람들은 경악하고 전율한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은 폭포수처럼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사람의 소리라 여겨질 수 없는 그의 목소리에 정신을 놓고 만다.
감동엔 강요가 있을 수 없다.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감동이다. 너무도 놀라워 난 여러 명의 지인들에게 이 영상을 전달했다. 혼자 보기가 아까워서다. 벌써 오래 전에 한 바퀴 다 돌았다는 영상을 난 이제야 보면서 다시 본다 해도 다들 나와 같은 감동을 받으리라는 생각으로.
지난 주 강의 중에 ‘응시(凝視)’에 대해 애길 했었다. 응시란 사전적 해석으론 ‘눈길을 모아 한 곳을 똑바로 바라봄’이다. 더 지식적으로는 ‘안구의 초점이 대상이나 장면에 고정되는 것으로 수초 간 지속되는 이 고정시간동안 관찰자는 자극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고 되어있다.
그러고 보니 근래 들어 나는 무엇에도 제대로 응시를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한 곳에 눈길을 모은다는 것, 한 곳을 똑바로 바라본다는 것은 지극한 애정이요 관심이다. 한데 내 눈은 한 순간도 한 곳에 집중하기보다 여러 가지를 동시에 좇으며 여러 개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한 곳을 바라보는 것에는 오히려 어색해 한다. 그러다보니 한 가지에 몰두하여 나아가질 못한다. 아니 몰두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러면서 결과에는 아주 민감하고 급급해 한다. 여기 찔끔 저기 찔끔 얼굴만 내밀면서 나를 기억해 주길 바란다. 물론 한 곳을 바라본다고 다 한 마음일 수는 없다. 바라보는 방향은 같아도 바라보는 대상은 다를 수 있다. 한 곳을 바라본다고 다 같은 곳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착각일 수 있다.
그런데 내게 보내져 온 동영상을 보면서 어쩌면 저리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눈을, 눈빛을, 그의 입을 바라보며 한 가지 마음을 갖는 것이 보여 놀라웠다. 하나같이 손을 눈에 대고 눈물을 닦아내고 있다. 그의 입을 통해 터져 나온 목소리가 한 순간 그를 바라보고 있는 모든 이들의 눈뿐 아니라 가슴까지 사로잡아 버렸다. 한 심사위원은 심사평에서 그냥 끌어안아주고 싶다고 했다. 어쩌면 가장 진실하고 숨김없는 심경의 표출일 것 같다. 언제 한 번쯤이라도 연탄재처럼 뜨거워져 본 적이 있느냐던 시인의 싯귀가 생각난다. 그의 열정만큼 바라보는 눈길들의 뜨거움도 느껴졌다.
우린 바라보는 것에 참 인색하다. 대충 보고 지나치곤 한다. 그렇게 지나치니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기억하지 못 한다. 관심이 없다. 그러니 집중하지도 집중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그가 내게 하려는 말, 하는 말을 듣는다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다.
언젠가 혼자서 ㅈ 공원엘 갔었다. 작은 내가 흐르는 것이 보이는 벤치에 앉아 흘러가는 물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물의 양이 불어나는 것 같더니 유속도 빨라졌다. 이상하다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다봤지만 특별히 달라진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물이 불어난 걸까. 조금 지나자 물의 빛깔도 달라졌다. 맑은 물이던 것이 많이 탁해졌다. 그러고 보니 나무에 가려진 조금 멀리의 하늘빛은 이곳과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 상류 쪽 어디에선가 소나기라도 내린 것일까. 몸의 대부분을 건방져 보일 만큼 위로 내놓고 있던 물가 식물들이 갑자기 불어난 물에 반쯤은 잠겼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놀고 있는 가족인 듯한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만 보이던 이 변화, 삶도 어쩌면 이렇지 않을까싶다. 같은 곳에서 일어난 상황이라도 누구는 그걸 느끼고 누구는 전혀 알지 못하고 넘어갈 수 있다는 것, 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다는 말처럼 얼마나 관심을 갖느냐에 따라 볼 수도 못 볼 수도 있음일 것 같다.
눈길을 모아 한 곳을 똑바로 바라본다는 것은 사랑의 눈으로 본다는 말이다. 사랑은 관심이고 집중이다. 그래서 볼 수 있다. 아니 보인다.
노래하는 젊은 청년, 그 목소리가 너무나 아름다워 눈물이 날 지경이지만 그가 살아온 삶의 슬픔과 아픔과 고통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이다. 그에 대해서 알고 노래를 들으니 그가 그렇게 열정적으로 절실하게 노래를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안 될 그를 알게 되었다고 할까.
그를 바라보던 수많은 눈들, 그것은 그냥 바라봄이 아니었다. 따뜻한 응시였다. 잘 해야 될 텐데, 꼭 잘 해야 돼, 잘 하지 않으면 안 돼, 수많은 눈들이 그를 향해 따뜻한 성원을 집중적으로 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기도였다. 이뤄지지 않을 수 없는 기도, 그를 향한 수많은 눈길들이 그를 향해 보내는 뜨거운 성원이었다. 그때 공원의 작은 내에서 조용히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보면서 내가 깊은 관심으로 보지 않아 지나쳐버렸을 수 있는 수많은 변화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갑작스런 물살에 꺾여 떠내려가는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건져내어 들고 그게 나인 양 아니 내가 눈여겨 봐 주지 않아 그렇게 된 것인 것 같아 한참이나 바라보았었다.
K교수가 보내준 영상은 끝났건만 그를 향하여 모아지던 눈빛들은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 얼마나 이런 진심으로 사랑의 눈길을 주어본 적이 있는가. 얼마나 진실하게 누군가를 바라봐 준적이 있는가. 나 자신에게도 이웃에게도 진심 담긴 눈길로 바라보며 따뜻한 마음을 갖는 것이 이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젊은이를 향해 보내주던 눈길들이 그의 작은 키를 두 배나 크게 보이게 했다. 그만큼 나는 작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도 나를 주시하고 있는 이 따뜻한 눈빛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