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향으로 우려낸 초저녁 입담이 옅어질 즈음 허기는 짙어졌다. 갑작스런 비는 어느새 눈으로 내리고 있었다.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우리는 코트와 점퍼의 후드로 대충 몸을 감쌌다. 적당히 기분 좋은 눈을 맞으며 도심의 불빛을 훑었다. 부끄럼 많은 골목이 수줍게 내미는 ‘수제 칼국수’가 눈길을 잡아끌었다.
따뜻한 바닥이 군불을 지핀 듯 정겹다. 앉은뱅이 식탁에 앉으며 서둘러 칼국수를 주문했다. 시장기부터 삭이라는 듯 먼저 식탁에 놓인 건 보리밥. 작은 공기의 보리밥에 열무김치와 고추장이 곁들여진 사이드메뉴다. 칼국수가 나오기 전의 맛보기는 입맛을 돋우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예전 어느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시키면 약간의 쌀밥이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짜장면을 먹고 남은 양념에 비벼 먹으라는 후덕함에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그것과는 좀 다른 배려, 배를 채우라는 것이 아니라, 전혀 성격도 다른 보리밥을 맛보는 즐거움을 누리라는 듯했다.
김이 무럭무럭 피는 칼국수는 본게임이다. 채친 호박과 파, 잘게 부순 김 등 고명이 핀 꽃밭은 눈을 호강시킨다. 국물 한 숟갈에 방금 먹은 보리밥이 쓰르륵 내려가는 듯하다. 칼칼하게 비벼먹은 보리밥에 부드러운 면발은 특별나지 않은 사람들의 감춰둔 매력 같다. 종류도 다양해서 닭 칼국수, 팥 칼국수, 바지락 칼국수, 장칼국수, 김치칼국수 등 덧붙이는 재료에 따라 이름과 맛을 달리하는 칼국수. 그러나 최소한의 양념으로, 본래의 국수 맛을 잃지 않는 비법이 중요하다. 눈 내리는 창밖의 풍경과 잘 어울리는 따뜻한 한 끼다.
보리와 밀은 같은 항렬을 따르지만, 비슷한 듯 다른 형제 같다. 맥麥은 보리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밀을 뜻하기도 한다. 보리는 대맥이라 부르고, 보리보다 알이 조금 작은 밀은 소맥이라 불린다. 심고 나고 자라는 생장 과정도 비슷하다. 그러나 원래의 성분과는 판이한 음식으로 다시 탄생한다.
누군가 가을걷이를 할 때면 또 다른 누군가는 씨를 뿌린다. 추위를 겪어야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보리와 밀은 사철의 기운을 받는다. 봄에 씨를 뿌려 가을에 수확하는 다른 곡식과 차별되는 월동작물이다. 겉은 차고, 안은 따뜻한 기운을 지닌 것은 거친 눈보라를 견뎌내며 키운 성질이다. 겨울의 괴로움을 참아내야 봄날을 맞는다. 늘 풍요롭고 안락한 봄날을 원하지만, 그런 봄날은 없다. 추위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봄의 따뜻함을 느낄 수 없다. 모진 겨울을 견뎌낸 밀과 보리의 투박함은 도정한 쌀의 매끄러움과는 다른 맛이다.
밟아야 튼튼해지는 보리와 밀. 서릿발에 뿌리가 들뜨면 웃자란 것들은 얼어 죽는다. 어른들을 따라 보리밟기에 나섰던 동심에게 사람도 웃자라면 안 된다던 묵은 말씀이 뒤늦은 경전이 되었다. 지극한 사랑에 부족함을 모르고 웃자라서 부모도 친구도 선생도 안중에 없는 덩치만 키운 아이들. 밟힌 보리가 건강하게 자라듯 여문 열매를 맺으려면 꼭꼭 다져주어야 한다.
밀밭과 보리밭은 서로 이웃하면서 경쟁하듯 봄볕을 부른다. 푸른 바람과 들꽃의 향내와 새들의 지저귐은 겨울을 이겨낸 뒤 받는 축복이다. 보리피리와 종달새의 노래가 어울리는 봄은 평화롭다. 숲속 장끼는 제 짝을 부르고, 보리밭에서는 갈맷빛 청춘의 춘정春情이 무르익는다. 바람이 허리춤에서 보리밭을 흔들 때, 살 부비며 우는 소리가 들린다. 자지러지는 듯한, 철썩이는 파도소리 같은. 모두 봄바람이 만들어낸 걸작이다. 거친 겨울을 이겨낸 봄이 만든 푸름은 어느 화폭에서 살랑거리기도 해서 보리밭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그것의 여운이었을까, 밀밭을 보고도 보리밭으로 착각한 때도 있다.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이삭이 패기시작하면 보리와 밀은 차츰 본색을 드러낸다. 보리는 피리를 만들어 불 만큼 대가 굵은데 비해 밀은 날렵하다. 또한 밀에 비해 보리 이삭은 길고 무성하고 알이 통통하다. 익으면 보리는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지만, 밀은 다소곳이 숙인다. 까락은 밀에 비해 보리가 더 많고 길다. 초록이 짙어지는 초여름, 들판을 가을빛으로 물들이는 보리와 밀은 생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동문수학하던 동무가 서로 다른 길로 가듯, 보리와 밀은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다. 밥과 빵과 국수 등 다양한 음식으로 허기와 취향을 채워주는 것이다.
정으로 먹는 음식이 보리밥이다. 들녘에서 열무김치와 비벼먹던 보리밥은 농심이었다. 거친 꽁보리밥을 찬물에 말아들고 서둘러 나서는 종종걸음들. 식감이 거친 보리밥은 아무리 잘 지어봤자 보리밥이다. 그것이 지금은 별식으로 통한다. 쌀밥보다 귀한 대접을 받는 별스러운 일에 누구는 혀를 찰것 같다. 한 알 한 알이 귀신을 본다는 고양이 눈과 닮은 보리. 잘 퍼진 보리알엔 반짝 켜진 눈빛이 보인다.
칼국수는 만드는 과정부터 정성스럽다. 안반에서 홍두깨로 쓱쓱 밀어내면 어느새 두리소반 만큼 반죽이 자란다. 손맛까지 보태진 칼국수는 질리지 않는다. 지금도 낯익은 손맛이 그리울 때면 단골 국수집으로 향한다.
보리밥과 칼국수의 절묘한 궁합. 보리밥의 껄끄러운 식감을 칼국수의 쫄깃함이 덮어주고, 고추장으로 비빈 보리밥의 매운 맛을 칼국수의 구수한 국물이 달래준다. 두 음식이 한 식탁에서 만났다. 투박한 남자와 보드라운 여자의 만남이랄까. 같은 땅에서 심겨져 사철을 함께했고, 잠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인연. 두런두런 정을 먹는 한 끼. 나도, 너도 두 음식의 궁합처럼 내내 차지고 정감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