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수필/신재기

 

                 짧은 수필은 ‘15장’이란 일반 기준보다 두드러지게 짧은 수필을 말한다. 단수필, 장수필(掌隨筆),

                      5매수필, 미니 수필, 손바닥 수필, 아포리즘 수필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한국 현대수필이 20세기 초창기 근대 저널리즘의 성장에 편승하여 착지했으니, 그 역사는 100년이 넘었다. 이 역사를 걸어오면서 수필의 길이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200자 원고지 15장 내외의 길이라는 외적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지금은 원고지를 사용하지 않고 있어 ‘200자 원고지 15장’이란 길이는 막연하여 구속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기준인데도, 창작되는 수필 대부분이 이 길이를 수용한다. 다른 장르와 비교해 보더라도 신기할 정도로 길이의 넘나듦이 상대적으로 적다. 그렇다고 특정한 길이를 염두에 두거나 측정해가면서 창작에 임하지도 않을 터인데, ‘15장’이란 길이가 별다른 저항 없이 용인되고 있다. 100년 역사 가운데 자연스럽게 굳어진 결과다. 이제는 이 길이의 개념과 원칙이 창작 과정에서 외부 강요가 없는데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기에 이르렀다. 수필가 대부분은 이를 불문율처럼 받아들이고 따른다.

 

  수필이 짧은 시와 긴 소설의 중간에 위치한다고 하더라도 ‘왜 15장이어야 하느냐’는 의문은 남는다. 글 길이에 따라 문학 장르를 구분하는 것은 그리 과학적이지 못하다. 드러나는 외형을 두고 단순하게 판단할 뿐이지 미적 구조의 보편성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짧으면 함축적이로 단순하며, 길면 세밀하고 복잡하다는 일반적 이해를 넘어서기 어렵다. 그런데 이 굳어진 형식의 불문율이 창작 과정에서 작가를 편하게 하지만, 기존 형식의 파괴와 새로운 실험이 주는 긴장을 무력화한다. 이 점이 ‘짧은 수필’의 출현 근거다. 굳은 관습에 대한 우연한 저항이 계기가 되어 ‘짧은 수필’이란 장르 인식이 출발했는데, 이제는 그 개념이 어느 정도 정착된 것 같다. 몇몇의 발상 전환이 큰 영향을 끼친 셈이다.

 

  ‘짧은 수필’은 ‘15장’이란 기준보다 두드러지게 짧은 길이의 수필을 말한다. ‘200자 원고지 15장’이란 길이가 100년의 긴 세월을 거치면서 진화된 기준이라면, ‘짧은 수필’은 한국수필이 출발하는 초창기부터 있었다. 당시는 발표 지면에 따라 그 길이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발표 지면이 넉넉지 못하던 때에 수필의 평균길이는 지금과 비교하여 훨씬 짧았다. 이때는 ‘짧은 수필’이란 인식이 아예 없었다. 발표 매체가 풍족하여 길이 제한이 필요 없는 시기에 이르러 미학적 근거와 관계없이 ‘15장’이란 원칙이 관습으로 굳어져 통용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수필의 길이가 불문율로 고정된 후, 이에 대응하여 15장보다 훨씬 짧은 수필이 의도적으로 창작되면서 짧은 수필은 하나의 하위 장르로 부각했다.

 

  일부 학자나 평론가는 짧은 수필을 포함하는 미니 문학을 디지털 문학의 소산이라고 설명한다. 디지털 문화 환경에서 생산되는 예술 형식은 선조적 전체보다는 파편화된 부분을 지향하는 특징을 보인다. 디지털 코드와 문화에 익숙한 독자에 다가가려면 복잡한 구조보다는 간단명료한 것이 필수적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문학 형식의 미니화는 디지털 문화 여건의 산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술 현상으로서 미니멀리즘을 전적으로 사회문화적 토대의 반영으로만 보기 어렵다. 현재 수필 전체가 짧아진 것은 아니다. 짧은 수필이라는 개념이 대두되어 널리 알려지면서 일부 여기에 바탕을 둔 수필 창작이 의도적으로 이루어지고, 그것이 수필 문단에서 주목받고 있을 따름이다. 오히혀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들어와 글의 길이는 전반적으로 늘어났다. 가상공간에 신종으로 기착한, 다양한 상호소통적 글쓰기는 그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다. 하지만 오랜 전통을 가진 양식의 글은 디지털 시대에 들어와 컴퓨터 글쓰기 방식을 채택하고, 가상공간을 포함하여 발표 지면이 엄청나게 증가함으로써 각개 문장을 짧아졌으나 전체 길이는 늘어났다. 즉, 컴퓨터 글쓰기의 구조적 특징은 언어의 남용을 불러왔고, 정보의 되새김보다는 정보 발설 쪽으로의 쏠림 현상을 드러냈다.

 

  육필의 아날로그 글쓰기는 구심력의 작동으로 압축형이 되지만, 디지털 시대 컴퓨터 글쓰기는 원심력 작동으로 확산형이 된다. 이에 글의 길이가 길어질 수밖에 없다. 수필도 마찬가지다. 외형상으로 단출했던 수필이 컴퓨터 글쓰기가 일반화되면서 전반적으로 그 길이가 길어졌다. 수필의 길이 확장은 수필가의 주관적 경험과 감정의 세밀화 내지는 확대를 뜻한다. 이는 언어의 함축적 사용과 암시를 생명을 하는 문학의 원리를 배반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수필의 유행으로 기존 수필이 주었던 강렬한 감흥과 명료한 주제 의식은 유실되었다. 이에 대한 반감과 새로운 방향 모색이 ‘짧은 수필’의 시도로 이어졌다.

 

  길이가 짧은 수필은 단수필, 장수필(掌隨筆), 5매수필, 미니 수필, 손바닥 수필, 아포리즘 수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장수필(掌隨筆), 단수필, 장수필(長隨筆)등의 명칭은 소설의 하위 장르 명칭에서 차용한 것이다. ‘손바닥 수필’은 장수필의 순우리말 이름이다. 이미 소설에서 학습한 바 있고 짧다는 점을 쉽게 인지할 수 있는 용어인지라 그리 어색하지 않게 들린다. 물리적 길이만을 지칭하는 ‘짧은 수필’이나 ‘단수필’보다는 비유적으로 표현하여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용어다.

수필가 정목일은 ‘5매수필’에 관해 이렇게 설명한다.

 

  ≪월간문학≫지 출신 수필가들의 모임인 ‘대표에세이문학회’에서 2002년도 연간집을 ‘5매 수필’로 하기로 결의하고, 세미나의 주제를 ‘5매 수필의 개척과 방향’으로 잡은 것이 본격적인 논의의 시초였다고 한다. 대표에세이문학회에서는 ‘장편(掌隨)’이란 단어가 추상적이기 때문에 분량에 대한 구체적인 명시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5매 내외가 적당하다는 함의를 도출하였다.

 

  ‘5매 수필’원고지 5장이라는 구체적 길이를 제시한 것이 과연 적절했는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으나 어쨌든 현재 ‘짧은 수필’의 명칭으로서 널리 사용된다.

    

  ‘짧은 수필’을 뜻하는 다양한 명칭이 외형적 길이에 무게를 두고 있어 단조롭지만, 이런 용어는 단순할수록 전파력이 더 클 수 있는 법이다. 다만 ‘15장’을 수필 길이의 표준으로 설정하고 이것보다 짧은 수필이나 긴 수필로 구분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길이에 따른 형식상의 차별성이 전제되지 않은 장르 구분은 그 외연이 모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5매 수필’과 ‘15매 수필’이 보여주는 길이의 편차는 작품 내적 구조의 차별성을 드러낼 가능성이 있으나 ‘5매 수필’과 ‘8매 수필’은 작품의 미세한 물량적 차이를 제와하고 구조상의 변별성을 드러내기 힘들다.

 

  작품의 길이를 기준으로 삼는 장르 구분은 기준 자체로서는 명확하나 논리적 타당석을 확보하기 어렵다. 단지 일반 수필보다 확연하게 짧은 수필을 편의상 ‘짧은 수필’로 명명할 뿐이다.

 

출처_『수필의 기본 개념들』신재기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