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이끌림 / 김영인
책을 뒤지다가 문득 하나의 풍경을 만난다. 읽고 있던 책을 가방에 부랴부랴 집어넣고 도서관을 빠져나온다. 차 시동을 걸고 달린다. 세찬 바람이 차창을 후려친다. 차는 거센 바람의 몸을 순식간에 가르고 밀어낸다.
칼바람을 타고 눈발이 몰아치며 시야를 흐린다. 산허리를 돌 때마다 위험 표지판이 경고한다. 사망사고 발생한 곳, 미끄럼 주의, 산사태 주의, 공사 중, 낙석 주의…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굽은 길을 돌 때마다 문득문득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든다. 무엇 때문에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달리는 것일까.
온 산을 뒤덮은 눈, 뭉게구름 뒤로 펼쳐진 뽀얀 하늘빛, 세상이 온통 새하얀 도화지 한 장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물소리를 잠재우고 눈밭으로 변한 계곡이며 서리꽃을 풍성하게 매단 나무들, 개구쟁이 울라프처럼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눈썰매를 타는 아이들, 곤돌라 안에서 보이는 풍광은 마치 만화영화 겨울왕국으로 들어가는 듯 환상적이다.
곤돌라에서 내린 사람들이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발밑엔 공룡 발자국 같은 눈구덩이가 한 줄로 깊게 파였다. 앞사람이 디딘 그 흔적을 뒷사람이 그대로 밟으며 올라간다. 몸을 둥글게 말고 조심조심 오르는 이들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날카로운 눈보라에 금세 두 볼이 빨개진다. 저들 또한 왜 이 거친 산을 이토록 힘겹게 오르는 걸까.
어디선가 탄성이 들린다. 고갤 들어 바라보니 순백의 성전 하나 솟아 있다. 거센 눈바람이 밤새 빚어낸 눈꽃터널, 그 조형물에 산호초며 사슴뿔 같은 백설 꽃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마치 요정의 나라로 들어가는 궁륭 같다. 한 가지 색으로 이루어낸 환상적인 자연의 조각품 위로 동고비 한 쌍 쉴 새 없이 오가며 노닌다.
꾸역꾸역 오르다 보니 정상이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칼바람이 사방에서 몰아친다. 바위 턱에 쌓인 눈을 쓸어내고 걸터앉는다. 눈을 한 움큼 감싸 쥐고 후! 입김을 분다. 폐부 깊숙이 공기를 들이켠다. 손에 잡힐 듯한 뭉게구름 빠르게 흘러가고, 굵은 주름과 등뼈를 훤히 드러낸 설산 위에는 앙상한 나무들이 담담히 참선에 들었다.
멀리 겹겹의 산 사이로 뭉게구름이 넘실거린다. 희미한 능선들이 너울성 파도처럼 출렁댄다. 바람은 주문처럼 해독할 수 없는 소릴 내지르며 지나간다. 허공에서 저절로 그려지는 수천수만 장의 수묵화들, 그 풍광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부분을 오려 액자 속에 담아 놓은 산수화 같다. 하늘과 땅의 구분이 없고 만물의 구별조차 없는 공간 속으로 나도 스르르 스며든다.
세상에 태어났을 때 나도 순백의 도화지였다. 아장아장 걸으면서 엄마 치맛자락 잡고 병아리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그러다가 울타리 밖으로 나가 동네 또래들과 어울렸다. 풀잎 한 줌 빻아 엄마 아빠 소꿉놀이를 했고, 냇가에 뛰어들어 물장구도 쳤다. 소·염소 풀 뜯기러 가는 언니 오빠들 따라가 초원을 뛰어다녔다. 배가 고프면 다래며 머루 따 먹고, 개울가에서 가재도 잡았다. 엄마, 친구, 자연만으로도 충분했다.
중학교 때부터 남과 나를 의식했다. 땡볕에 그을리고 깡마른 나와는 달리 뽀얀 얼굴을 가진 도심 친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애들이 가진 필통이며 도시락, 그 안에 든 펜과 반찬이 달라 보였고, 같은 머리 스타일에 같은 교복에 같은 구두를 신어도 더 예뻐 보였다. 비로소 나는 우리 집이 가난하고 내 모습이 초라하고 시골이 촌스럽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처럼 되기 위해 외모를 가꿨고, 책을 더 오래 붙잡았다. 분수에 맞지 않게 더 좋은 직장을 찾아다녔고, 더 괜찮은 남자를 바랐다. 현실에 깊숙이 섞일수록 비교와 포장이 많아졌다. 시기며 경쟁심, 열등감도 커졌다. 그렇게 서서히 내 마음의 얼룩은 늘어갔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유년의 뜰이 그리워졌다.
밋밋한 산등성이에 펼쳐진 드넓은 초원, 집 건너편 산 중턱에 우뚝 선 채 수많은 전설을 만들어냈던 거대한 바위, 늘 궁금했던 산 너머의 세상, 동네 앞 맑은 시냇물, 물가에 놓여있던 크고 작은 바위들, 눈사람 만들고 눈싸움했던 동네 앞 논바닥, 산수화 같던 솔밭 설경, 눈이 초롱초롱 빛나던 소녀가 오갔던 비포장 등하굣길, 그 길가에 펼쳐진 대자연의 초록 물결, 눈밭보다 환했던 이화(梨花)의 물결 사이로 달려가던 멀미 난 버스, 그 안에서 휘청거리던 어린 눈빛들, 막차 안에서 보았던 밤하늘의 무수한 별, 가슴을 파고들던 노래, 먼 그리움….
생명 그 자체로 순하게 서 있는 자연에 들면 마음이 맑아졌다. 그래서 내면에 얼룩이 질 때면 늘 이러한 풍경을 찾아 떠났다. 내 어린 날의 정경을 찾아 떠나는 길은 언제나 설레었다. 순수로 회귀하면 신기하게도 얼룩덜룩 덧칠해진 세상의 때가 지워졌다. 가난하고 외롭지만 마음만은 풍요로웠던 날, 그 서정의 세계는 내게 영혼의 안식처와 같았다.
설산에서 내려오는 길, 마치 꿈속을 다녀온 듯 아련하다. 마음 바탕에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도화지 한 장이 깔린 것 같다. 내면의 암실에 찍어둔 순백의 풍경들, 영혼이 혼탁해질 때마다 한 장씩 인화해 볼 것이다.
자연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 눈이 오나 폭풍우가 몰아 치나 항상 그곳에 있는 자연, 내면이 얼룰질 때 그런 풍경을 찾고 그곳에서 안식을 얻는다는 작가,
자연은 우리에게 우리가 찾는 만큼, 발견한 만큼 위안과 안식을 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