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마주하기 원병묵

  

겨울에 태어난 소년은 어느새 마흔다섯 어른이 되었다. 되돌아보면 모든 겨울이 소중했다. 어릴 적 고향엔 눈이 많이 내렸다. 손이 갈라지고 발이 꽁꽁 얼어도 밖에서 뛰어놓기 좋아했던 시절, 겨울 내내 몹시도 추웠지만 소년에게 그 시절은 모험과 즐거움이 가득한 시간이었다.

겨울을 맞이하며 문득 깨달은 한 가지! 겨울은 언제나 같은 자리 같은 시간 기척 없이 다가왔다. 마흔다섯 번의 겨울은 늘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여전히 겨울은 다시 찾아오는데 그 시절 사랑하는 사람은 다시 오지 않는다. 소년에게 춥지 않은 겨울은 낯설었다.

겨울을 마주하며 잊을 수 없는 기억 하나가 있다. 찬바람에 낙엽 떨어지고 아침 서리가 땅을 덮을 무렵 아버진 훌쩍 떠나셨다. 어째서 그렇게 급히 가셨을까? 어린 소년은 답을 알지 못했다. 소년에게 겨울은 그렇게 차갑고 외로웠다.

겨울을 마주한다. 문득 생각이 스친다. 크리스마스 캐럴 울리는 거리 가득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따뜻하게 손을 꼭 잡아주며 연인이 되어준 아내. 그 따스함 덕분에 소년에게 겨울은 낯설게 다가왔다.

겨울을 마주한다. 새벽녘 반짝이는 샛별처럼 새해의 설렘과 희망 가득한 맑은 날 태어난 큰딸. 스무 해 동안 천사 같은 그 아이를 키우며 소년은 어느새 어른이 되었다. 겨울은 이제 더 이상 춥고 외로운 계절이 아니다. 이제야 조금 알 듯하다. 생명을 품은 겨울은 따뜻하다.

계절을 따라 생명도 순환한다. 죽음도 생명도 자연의 순환일 뿐. 겨울도 생명의 연속을 위해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뿐이다. 이별의 겨울은 춥고 외롭지만 생명을 품은 겨울은 따뜻하다.

봄의 기운은 언 땅을 녹이며 땅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겨울이 품었던 생명은 봄의 새로운 세상에서 소생한다. 생명은 봄의 따스한 햇살 아래 파릇파릇 돋아난다.

대지를 가득 뒤덮은 생명은 여름 내내 활활 타오른다. 메마르고 거친 들판에도 거침없이 생명은 용솟음친다. 봄여름 동안 생명은 만개하는 꽃이 되어 끝없이 자란다.

가을엔 생명이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난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나 이전의 삶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며 다음의 생명을 위해 헌신한다. 가을은 성숙과 수확의 계절이다.

겨울엔 생명이 희망으로 바뀐다. 희망은 꿈이 되고 새로운 생명의 씨앗으로 정제된다. 겨울은 생명을 따스하게 품는 계절이다. 겨울 없인 봄이 없다. 여름도 가을도 없다. 겨울 내내 희망이 씨앗으로 영글어 다음 봄의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진다.

생명은 겨울의 단단한 대지를 뚫고 솟아난 새 희망이다. 탄생과 함께 순식간에 지나가는 봄과 여름 그리고 어느새 문득 다가온 가을과 겨울. 계절은 끊임없이 생명의 순환을 반복한다.

다시 겨울을 마주한다. 벌써 마흔다섯 넘게 마주한 겨울! 겨울에 대한 추억이 가득하지만, 그것만으로 겨울을 알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겨울은 더 큰 깨달음을 주려 한다. 겨울이면 떠오르는 추억들, 가만히 겨울 노래를 듣는다.

 

별빛이 맑게 빛나는 내 슬픈 얼굴아

기러기 울며 날아간 하늘을 보네

그리움 눈처럼 쌓여 언덕을 굴러넘고

파란 달빛 나린다 내 텅빈 뜨락에

바람은 나뭇잎을 휘몰고 사라졌는데

왜 아픈 그리움의 조각배는 내 가슴에 떠 있는가

지울 수 없나 없나 겨울이면 떠오른 영상

파랗게 시린 내 사랑 얼어버린 슬픈 뒷모습

-<겨울 애상> 김요일 작사, 송시헌 작곡, 이선희 노래

 

봄의 생명력은 겨울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모두 겨울을 이겨낸 생명이다. 겨울이 품은 생명이다. 생명은 희망의 씨앗이 되어 겨울 내내 땅 속에서 봄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대지를 뚫고 생명으로 탄생한다. 씨앗에 담긴 생명의 기적이 다음 세대로 안전하게 이어진다. 이것이 자연의 순리이다.

차갑고 척박한 외로운 땅에도 생명의 씨앗은 숨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땅속에도 생명의 씨앗이 감춰져 있다. 보지 못하는 어두운 곳에도 생명이 숨쉬고 있다. 이것이 생명이 생명으로 이어진 비밀이다.

우리의 삶 속에도 겨울이 늘 찾아왔고 생명이 멈추지 않았다. 희망이 있는 한, 사랑이 있는 한 겨울은 춥고 외로운 계절이 아니다. 겨울은 생명을 품은 봄을 준비하는 계절이다. 이것이 겨울의 의미이다.

마흔다섯의 겨울을 마주하며 비로소 작은 깨달음을 얻는다. 겨울은 씨앗을 품는 계절이다. 그 씨앗은 본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음 봄을 위한 것이다. 겨울은 포근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며 씨앗을 품는다.

그러기에 가을을 지나온 나무는 모진 추위와 바람을 의연히 견디며 당당히 서 있는 아름다운 겨울나무인 것이다. 앙상하고 보잘것없는 존재가 아니다. 나무가 지켜낸 사랑은 무엇보다 숭고하다.

겨울은 끝이 아니다. 차갑고 외롭기만 한 겨울이 아니다. 겨울은 생명의 씨앗을 품은 은혜로운 계절이다. 다른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는 자애로운 계절이다.

다시 겨울이 가만히 곁에 다가온다. 씨앗을 품은 따뜻한 겨울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 추운 겨울도 이제는 두렵지 않다. 어떤 겨울이 와도 이제는 얼마든지 따뜻하게 감싸 안을 수 있다. 삶이 가르쳐준다. 겨울은 생명을 품은 계절이라고. 겨울을 다시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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