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미래, 그리고 강적들< #1. 르네상스 시대와 에세이> /박양근

 


한국에서 말하는 수필을 달리 말하면 “인생 산문”이다. 수필은 산문체 문장으로 개인의 갖가지 인생 편력을 15매 전후로 담아낸다. 수필에 가까운 서양 장르로 흔히 에세이를 거론한다.『용재수필(容齋隨筆)』(74권 5집)의 서문에 ‘나는 버릇이 게을러 책을 많이 읽지 못하였으나 뜻하는 바를 따라 앞뒤를 가리지 않고 써 두었으므로 수필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와 달리 프랑스어의 에세(essai)는 “시도(試圖)한다, 시험(試驗)한다, ‘계량하다’, ‘음미하다’의 뜻이라는 점에서 출발부터 차이가 있다.

 

 프랑스의 문필가인 몽테뉴(Michel de Montaigne)가 <수상록>(1580)을 발간하고 자신의 글에 ‘에세(essais)’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은 가볍지도 과하지도 않는 문체로 세상의 다양한 주제를 인간중심, 나아가 ‘다른 사람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기준’으로 풀어내는 실험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는 고대의 영웅이나 중세의 신 중심의 담론과 다른 “Meism”이라는 새로운 문체운동에 속한다. 그의 담론은 고전에 의탁한 성서 인용을 거부하고 종교윤리와 문학을 분리시켰다는 죄목으로 1854년까지 약 170년 동안 바티칸의 금서 목록에 오르는 비운을 겪었다. 교회 권위와 종교 담론이 성행하던 시절에 “나 자신이 이 책의 주제다.” 라는 말은 인간중심의 사상과 표현을 바탕으로 하면서 기독교의 기존 가치관을 해체하는 혁명적이고 실험적 장르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그 점에서 몽테뉴의 에세이는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ais-je)”와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도한다.”라는 두 개념을 통합함으로써 당시로서는 아방가르드적인 산문이라고 하겠다.

 

 

 <수상록>이 발표된 전후의 유럽은 오늘날처럼 격동의 현장이었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1600년에 조르다노 브루노가 설파한 우주의 무한성,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재판에 회부된 1633년, 최초의 세계전쟁인 30년 전쟁(1618~1648) 등을 보면 <수상록>이 발간된 1580년대는 혼돈과 변혁의 격동기에 해당한다.

문학에서도 몽테뉴가 쏘아올린 에세이는 중세 암흑기 고전과 결별을 고한다. 장중하고 운율을 중시하는 중세 문체를 고수하던 신곡, 수상록, 명상록, 참회록의 패러다임이 무너지고 일상적이고 민중적인 텍스트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19세기 소설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몽테뉴의 책을 펼치는 곳마다 우리 자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말하였고 구스타브 플로베르도 ‘살기 위해서 몽테뉴의 <에세이>를 읽어라.”고 권하였다. 인간중심의 <수상록>은 개인성, 사회성, 시대성을 균형 있게 지님으로써 르네상스를 가속화시켰다.

 

 한국수필계가 한국수필의 효시로 떠받들고 있는 박지원의 <열하일기>(1780)도 엄격한 의미에서 수필보다 서구적 에세이에 가깝다. 열하일기의 집필은 당시 정조를 중심으로 한 한문체와 유교 사상에 대한 반동에서 출발한다. 청나라의 정치·경제·병사·천문·지리·문학 등 신문물을 소개하여 조선의 르네상스인 실학사상의 도입을 주창하고 형식이나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문체와 문물 열전(列傳)은 박지원 개인의 삶이 주제이다. 그 점에서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몽테뉴의 <에세이>는 동일한 개인성, 시대정신을 갖는다.

 

 그럼에도 한국수필가들은 두 저술가가 주창한 실험성과 진화성을 주목하지 않았다. 현재의 한국수필이 지닌 문제는 무엇보다 시민독자를 무시하고 시대변화에 대처하지 못한 보수성에 있다. 에세이(Essais)를 수필(隨筆)에 직입(直入)하고 <용재수필>에서 말한 ‘붓을 따른다’라는 안일성에 혹하여 몽테뉴가 말한 ‘실험한다’가 지닌 진화적, 능동적, 친화적, 주체적 화소가 무시되었다. 이로써 한국수필은 감정과잉의필(餘筆), 산필(散筆), 한필(閑筆)에 머무르면서 작가 자신은 에세이스트로 불리고 싶은 모순에 빠진 것이다.


수필의 미래, 그리고 강적들< 2. 저널리즘 시대와 칼럼> /박양근


20세기는 빅토리아 여왕의 서거(1901)를 시작으로 근대화로 접어든다. 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혁명, 프랑스혁명,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 등 전례 없는 격변기가 지구 전체를 뒤흔드는 가운데 염세주의, 퇴폐주의, 무정부주의가 엉킨 불확실성이 하늘을 덮기 시작하였다.

 

 세계적 충격에 부딪친 시민 독자들은 ‘자기만의 시선과 이야기’를 지켜내는 산문인 몽테뉴식 에세이와 ‘더욱 신변적’인 찰스 램의 미셀러니에 만족하지 못하였다. 에세이의 강적으로 사회현상을 미리 예측해주고 생활방식을 가르쳐주는 교양 있는 산문을 요구하였다. 당시 급격하게 팽창하는 저널리즘을 등에 업고 나타난 것이 칼럼이다.

라틴어의 <columna>에서 파생된 <원주(成柱)>를 뜻하는 칼럼이 나타났다. 칼럼이 시작된 것은 1880년 전후이지만 1930년대에 신문잡지 발간이 증가하면서 저널리즘과 전문지식은 중산층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시대가 급격하게 변하면서 생존에 위협을 느낀 그들은 문학적 욕구를 충족시킬 시사문제, 풍속, 상식, 등 갖가지 생활 정보를 요구하였다.

 

 칼럼의 역사는 채 100년이 되지 않는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칼럼은 오늘날 수필처럼 모든 소재를 다루면서 강력한 강적으로 떠올랐다. 칼럼니스트들은 정치·경제·사회에 속하는 중요사항을 주관적으로 설득하려는 논설가와 달리 독자들이 관심을 갖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룬다. 정치는 물론 의식주, 4계절, 패션, 스포츠, 오락, 요리, 여행 등 상식과 잡학을 다 취급한다. 서정적인 문체와 해박한 상식, 유머와 날카로운 풍자(諷刺), 당대독자에게 친숙한 문장으로 10매 내외를 작성하여 이전에 수필을 즐겨 읽던 독자를 포섭한다. 문장력과 해당부분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칼럼니스트들이 고정란을 차지하면서 칼럼은 수필의 강적이 되었다.

 

 수필은 몽테뉴, 베이컨, 찰스 램, 에머슨 등 일류 에세이스트들이 고치지 못한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1930년대의 시류에 맞지 않은 40-50매의 분량, 자신에 이야기에 한정된 독자와의 공감의 단절, 급변하는 시류에 따르지 못한 소재의 제한 등으로 오늘의 한국수필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점이 무엇인지를 시사해준다.

뉴욕타임즈 토마스 프리더먼이 말한 칼럼의 요건은 좋은 수필의 요건이기도 하다. 그는 (1) “그건 몰랐네” 라는 지식, ⑵ 독자에게 “그렇게는 생각 못했네”라는 새로운 시선, ⑶ “내가 쓰지 못했던 걸 당신이 썼네”라는 속 시원한 표현, ⑷ 논란을 일으키는 재제, ⑸ 독자를 울리고 웃기는 것이다. 나아가 독자 편을 들고 양심적이며 솔직담백한 스토리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에 다다르면 수필은 위기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오죽하면 당시의 에세이스트들이 우아하고 정서적이기만 수필을 두고 “라벤더 향기를 가진 노파”라고 하였겠는가.

 

 몽테뉴가 시대정신과 문체를 포착하였듯이 저널리즘과 리터러시를 결합한 칼럼은 20세기의 산문시대를 열면서 중산층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켰다. 저널리즘시대의 담론으로서 칼럼은 시대 통찰, 새로운 표현, 대중의 관심사에 집중함으로써 에세이의 변종을 능가하여 20세기의 대표적인 산문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의 한국수필도 유럽 아방가르드의 영향을 받았다. 동경으로 유학하여 외국문물을 접한 식민지 시대의 인텔리들은 미국의 신비평, 영국의 자연주의, 독일과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러시아의 사회주의 문학을 두루 섭렵하면서 피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갈등을 담아내었다. 5558자를 하나의 문장으로 엮어낸 박태원의 「방란장주인」, 단수필로서 이태준의 「바다」와 김기림의 「길」, 시적 이미지를 구사한 한흑구의 「보리」, 소설양식을 차용한 이상의 「권태」 등은 당대의 언어와 사대정신을 함께 결합하면서 봉건주의 사회 안에 모더니즘을 세우려한 에세이이자 칼럼들이다. 이를 굳이 수필이라고 부른다면, 위의 작품들은 감정과잉과 교활한 문장술에 스스로 농락당하고 있는 오늘의 수필과 격을 달리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수필가들은 칼럼이 지닌 정점을 익히고 조선의 칼럼니스트들이 실험한 수필정신을 학습할 필요가 있다.


수필의 미래, 그리고 강적들< 3. 사이버시대와 스마트폰 소설> /박양근


 21세기 후반기부터 모든 문학은 전자매체와 결합한다. 106 개의 키를 가진 컴퓨터 자판기가 발명되면서 모든 문학 활동은 자판기 위에서 이루어지는 운명을 맞이한다. 그 두드러진 영향은 짧은 산문의 폭발적인 출현이다. 돌이켜보면 WWW 네트워크가 일으킨 문화혁명은 몽테뉴가 당면했던 르네상스, 칼럼니스트가 직면한 모더니즘의 세기적 변화를 능가한다. 구체적 현상으로는 필답언어의 붕괴, 온라인의 득세, 오프라인의 퇴조, 아방가르드 주기의 단축, 과학과 인문학의 통섭, 그리고 네티즌이라는 N세대의 출현 등이다.


  사이버 시대의 주역이 펜 세대에서 N세대로 바뀌었다. 네트워크(Network)와 시티즌(Citizen)의 합성어인 네티즌(Netizen) 세대는 컴퓨터 통신을 통해 정보를 교환하고 여론을 형성한다. 1970년 이후에 태어나 디지털 기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문명세대 주위의 공간에는 컴퓨터가 설치되어 전화보다 e메일과 셀 폰으로 쌍방향 의사소통을 하며 단순한 관람자, 청취자, 독자이기를 거부한다. 강한 개성과 자율성, 능동적 감정 개방과 관점을 갖고 자기혁신과 개발을 추구하며 오락과 학습과 창작활동도 디지털 매체를 통해 해결한다.

 

 N세대의 문화의식을 의미하는 “Netism”은 530년 전 몽테뉴가 말한 “다른 사람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기준으로 자신을 돌보라.”는 상기시켜 준다. 그들의 행동양식은 고스란히 기성세대에 파급되어 컴퓨터 환경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기성세대는 에덴의 동산과 노아의 홍수가 은유하는 땅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고 로마가 만든 도로가 아니라 인터넷이 정한 길을 따라가야 한다. N세대는 즐겁게, 비N세대는 마지못해 인터넷 글로벌화를 수용하는 것이다.

 

 문학도 그 대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주목할 점은 21세기의 전위적인 사이버리즘은 100년 전 1910-30년대의 아방가르드인 모더니즘과 질적 양적으로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당대의 사회현상을 반영한 문학이 이미지즘 같은 실험시(實驗詩)와 짧은 산문인 칼럼이라면 21세기 초를 지배하는 문학은 짧은 서사와 스마트 소설 형식으로 나타난다.

 

 미국 현대소설가 필립 로스는 “소설은 죽어가는 짐승”이라 하였다. 그의 말은 소설 장르의 종말이 아니라 장편픽션의 퇴장을 뜻한다. 보르헤스도 “단 몇 분의 말로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생각을 5페이지로 늘어뜨리는 짓”은 미친 짓이라고 질타하였다. 현재의 초스피드 테크놀로지 상황에서는 단편조차 읽기 버거운 장르가 되었다.

소설가들은 발 빠르게 이런 시대에 부응하여 짧은 팩션을 발명하였다. 셀폰 소설, 스마트폰 소설, 휴대(携帶) 소설, 수기(手機) 소설로 불리는 이 기발한 장르를 한국에서는 스마트소설이라고 한다.

 

 스마트폰 소설은 ‘콩트’가 아니다. 장편소설이 영화라면 스마트폰 소설은 사진과 같다. 소설이 영화처럼 서사를 펼쳐 관람객을 주도적으로 끌고 간다면 스마트폰 소설은 사물을 응축하여 생의 나이테를 보여준다. 셀폰 소설은 2003년 일본에서 시작하여 급속도로 아시아와 미국, 유럽, 남아공으로 퍼졌다. 도시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칙릿소설처럼 10대, 혹은 젊은 여성들의 적나라한 사적인 삶을 매번 200단어 미만의 텍스트 메시지로 발표하고 셀폰으로 독자와 실시간대로 공유하고 나중에는 종이책으로 묶어 발간하는 문학양식이다.

 

 표현기법은 사이버와 네티즌 세대에 맞는 기법을 사용한다. 압축된 문장, 극적 대화, 반전을 거듭하는 서스펜스, 정교하고 섬세한 시적 표현, 무드 있고 감성적인 문장의 흐름, 내면적 사색, 비꼬고 비트는 구성 등 시적 표현과 서사의 긴장미와 독자와 공감할 수 있는 사건을 선택한다. 시와 산문의 퓨전, 독자와 작가와의 실시간대 교감, 12매∼30매 정도의 분량과 성인의 삶을 소재로 다룬 통속성, 허구보다는 일상이라는 소재, 충격적 결말 등을 배합한 짧은 산문으로서 에세이와 칼럼에 이어 수필의 세 번째 강적으로 득세하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발표되고 있는 스마트(폰) 소설은 장편소설을 외면하는 현대도시독자들의 입장을 선도적으로 고려하여 인터넷과 블로그, 스마트폰 사용에 익숙한 젊은 소설가들이 주로 발표하고 있다.

 

수필의 미래, 그리고 강적들<4. 넷(Net)의식의 넷수필> /박양근


한국수필은 현재 외화내빈과 사면초가에 빠진 형국이다. 한국수필은 발전할 수 있는 여러 차례의 외적 충격이 있었음에도 잠자는 노부인처럼 개인의 신분적 자족감에 안주하여 사회적 기능과 시대적 요청을 소홀히 하였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다룬 몽테뉴의 에세이정신, 칼럼이 보여준 개량주의적 진화, 스마트소설이 취하고 있는 환골탈퇴는 시대의 변화와 독자의 요구를 엄중히 인식하고 능동적으로 변신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때마다 수필은 위기를 넘기며 문학적 수명을 연장하여 왔다.


  21세기의 수필은 무엇이야 하는가. 그 정의를 내리는 것은 분명 시기상조이다. 현시대의 문화현상은 복잡하고 유동적일 뿐 아니라 현 수필의 진로모색이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미래수필은 양적 발전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빅뱅과 같아 일순간에 폭발하여 해체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 수필다운 수필이 사라지고 있다. 개인사기(個人史記)로서 수필은 수필가들 사이에서만 유통하는 동안 처세산문, 여행기, 취미산문이 서점 진열대를 차지하고 있다.

 

 수필가조차 다른 수필가의 수필을 읽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넷시대에 살면서 넷시대 정신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해결방안은 언어망, 의미망, 관계망 외에 인터넷망이 의미하는 의식을 고려하고 미래수필의 좌표를 휴머니즘, 저널리즘, 사이버리즘, 미디어이즘 안에 설정하여야 한다. 그 수필을 넷수필로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넷수필은 인터넷이 지배하는 문화현상과 네티즌 세대를 의식한다. 인터넷은 21세기의 문화공간을 설명하는 키워드이고 넷(Net)은 작가와 독자, 온라인과 오프라인, 문자언어와 전자기호, 문학과 과학을 통섭하는 코드로서 이들은 퓨전을 기본공식으로 한다. 매체가 다양해질수록 갖가지 장르가 등장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전통장르인 에세이, 칼럼, 판타지, 연재물 외에 힐링산문, 담시(譚詩), 모험기행기, 댓글, SNS 글쓰기, 셀폰소설들은 수필의 저변을 넓히지만 수필독자를 빼앗아가는 악영향을 초래하기도 한다.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문학의 진보와 진화는 작가의 담론, 시대적 상황, 독자의 욕구를 융합하는 통섭(通涉, Consilience)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수필도 누적된 변화를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리스 로마시대의 참회록부터 몽테뉴와 찰스 램을 거쳐 버지니아 V. 울프와 현대 에세이스트에 이르기까지 실험수필의 기저(基底)를 느리지만 조금씩 수용하여 왔다. 그러나 21기를 맞이하여 시대의 산문으로서 진정한 호응을 얻으려면 보다 능동적인 대체가 필요하다. 사이버리즘 시대에 적합한 기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표준 언어와 문법의 변형과 전복이다. 한국의 굿과 서양의 랩(rap) 형식에 사용되는 구어는 다원적 소통을 원활하게 해준다. 수필언어는 문예이론가 필립 휠 라이트(Philip W. Right)가 분류한 닫힌 언어와 열린 언어 중에서 열린 언어를 선택하여야 한다. 기호, 숫자, 이모티콘, 약자, 부호 등 인터넷 통신언어를 일부 도입하면서 스마트폰 소설이 구사하는 감성 문장법을 응용하여야 한다.

 

 둘째는 형식의 혼용이다. 20세기 전위시(前衛詩)가 그랬듯이 대중화, 민중화, 속중화, 귀족화를 균형 있게 아우르려는 변화가 필요하다. 선비규방수필이 하이브라우(high brow)이고 신변수필이 로우브라우(low brow)라면 미래수필은 중산넷세대의 삶을 표현하는 (middle-brow)에 자리해야 한다.

 

 셋째는 미래수필은 다양한 독자층에 주목하는 것이다. 노동 인간(Homo Larbor)의 본성을 표현하는 직업수필, 특정 계층을 겨냥하는 컬트수필, 도시여성을 주인공으로 그려내는 칙릿수필, 틴에이저의 고민을 다루는 스마트폰수필, 동수필 등은 수필의 저변을 넓히고 수필가 개인의 독자성을 보장해줄 것이다.

 

 넷째는 장르간의 퓨전이다. 좁게는 시, 소설, 드라마의 장점을 빌려오고 넓게는 미술 음악과 통섭하며, 더 넓게는 인문학과 자연과학과의 유기성을 발전시켜야 한다. 장르간의 결합은 자연스럽게 독자층을 확대할 수 있다.

다섯 번째는 미니멀리즘의 도입이다. 미니멀리즘은 에세이와 동양적 수필이 지닌 엄숙주의에서 어떤 소재를 다루되 ‘깨끗한 압축이 아름답다’는 기법을 추구한다.

 

 이런 기법은 원고지와 A4용지와 컴퓨터 화면을 캔버스로 간주하고 가벼운 터치로 감성을 자극하는 샤프펜슬로 쓴 다이어리식 에세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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