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과 거울의 이중주 / 민명자
취미삼아 가면을 수집하는 지인이 있다. 그녀의 집엘 들어서면 벽이나 진열장에서 갖가지 표정을 한 가면들이 크거나 작은 얼굴로 낯선 손님을 반긴다. 그녀는 우울한 날엔 혼자 가면을 쓰고 벗으며 가면놀이를 즐긴다고 한다. 그럴 땐 익살스러운 표정을 한 가면이 제일 좋단다.
인간은 왜 가면을 쓰는가. 동물들이 보호색으로 자신을 위장하듯 가면의 제일 목적은 ‘자기보호’일 것이다. 원시시대 동굴 벽화에선 동물 가죽을 쓴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수렵이 생존수단이었던 그들은 분장을 하거나 동물 형상의 탈을 썼다. 얼굴에 무서운 형상을 그려 넣어 적에게 위협을 주는 한편 자신의 두려움을 해소하고, 동물 탈로 동류인 척 위장하면서 사냥의 성공을 위한 속임수와 주술효과를 겸한 것으로 보인다. 분장이나 가면은 일종의 보호색인 동시에 토테미즘·애니미즘 적 주술행위로써 창과 방패의 구실을 한 것이다. 가면 뒤에는 나약한 인간의 방어기제와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외경이 숨어 있다.
가면은 사회의 변천에 따라 다양하게 변모하면서 존속해왔다. 농경시대에는 농경의식과 제천의식, 향토성과 민속성이 반영된 가면극으로 발전했다. 우리의 경우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음력 정초에 성황신에게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마당극으로 펼쳐진다. 각시, 주지, 백정, 할미, 파계승, 양반과 선비, 초랭이, 부네, 이매 등이 탈을 쓰고 등장하여 지배층의 허위의식에 대한 희화화로 남녀노소 및 부귀빈천의 가치를 전도(顚倒)하는 동시에 풍요와 대동(大同)의 기원을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낸다. 단오제 때 관노들의 탈놀이로 전승된 강릉관노가면극은 장자마리, 양반광대, 소매각시, 시시딱딱이 등의 탈을 쓴 연희자들이 등장하여 무언의 골계미가 있는 춤판을 벌인다. 가면으로 풀어내는 화해와 신명풀이다.
저 멀리, 그리스 연극 시대에는 남자들이 가면을 썼다 벗었다 하며 여자 역할을 함으로써 페르소나의 원형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축제와 로마의 바쿠스 축제는 농신제(農神祭)의 일환으로써 카니발의 기원이 된다. 카니발은 그리스도교에선 사순절을 대비하는 종교적 의례행사로, 점차 신분사회에서 유희성을 겸한 저항적 민중문화와 도시문화로 자리잡아왔다. 가장행렬과 가장무도회 등 카니발 적 광장에서 민중은 주체가 되어 억압된 욕구를 승화 분출하며 해방감과 자유를 즐긴다.
가면이 갖는 특징은 무엇보다도 겉과 속이 다른 이중성일 것이다. 인간 삶과 밀접한 만큼 영화나 연극 등에서도 자주 소재가 되었다. 영화 ‘배트맨’이나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도 그 예다. 예전에 방영했던 드라마 ‘복면 검사’에서는 낮과 밤, 민낯과 가면, 속물 검사와 정의로운 검사 사이를 오가는 남자 주인공을 그렸다. 나는 요즘 ‘복면 가왕’이란 TV프로그램을 챙겨본다. 선입견과 편견을 배제하고 노래로 승부를 거는 것도 좋지만 가면 속에 감춰진 주인공의 진면목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 예상외 인물의 정체가 밝혀질수록 시청자는 환호한다.
그러나 가면이 놀이 영역을 벗어나 일반 삶으로 들어오면 피로의 기표가 되기 쉽다. 급변하는 사회를 사는 현대인의 고민 중 하나가 사회적 가면이 아닐까싶다. 살아가는 동안 셀 수 없이 썼다 벗었다 해야 하는 수천수만의 가면, 융(C.G. Jung)이 말하는 것 같은 페르소나다. 외부로 드러내는 언표와 내면에 감춰진 심적 진실 간에 괴리가 있는, ‘진정한 나와는 다른 나’의 얼굴이다. 가면은 때로 은폐 속의 자유와 오락을 선사하지만 향유하는 시간은 길지 않다. 왜? 가면은 결국 가짜 얼굴이고 벗음을 전제로 하니까.
가면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거울이 아닐까. 거울은 좌우가 전도된 상을 보여주긴 하지만 점 하나도 놓치지 않고 대상을 적나라하게 비춘다. 가면이 부끄러움이나 자의식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면 거울은 그러한 자기인식을 드러내는 기제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가면과 거울은 시각의 범주 안에선 친족 간이되 내밀한 본질에선 서로 등을 맞대고 있다.
신화에선 불과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거울을 발명했다고 전해지지만 거울의 원조는 미소년 나르키소스가 자기애에 탐닉하여 수선화가 된 샘물이 아닐까싶다. 중세에 인간은 신을 거울로 삼았다. 거울의 발달로 본다면 고인 물이나 반짝이는 검은 돌에 자신을 비춰보던 인류가 금속거울에 이어 유리거울을 발명한 것은 인류 문명사에서 획기적인 일이다. 거울 제조 기술이 없었다면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본 거울의 방은 빛의 반사가 지배하는 현란함의 극치였으며 ‘보고 싶은, 혹은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춤추는 공간이었다.
유리거울은 처음엔 귀족의 전유물이었으며 재산목록에 포함될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한다. 한편으론 사치나 허영, 마법이나 환상의 도구로도 인식되었다. 그러나 필수품으로 보편화되면서 미의식의 제고는 물론 그림에선 자화상의 발전을 이끌었다. 또한 물질로서의 거울은 자아와 대화하며 정체성을 통찰하는 상징물로서 정신 및 심리 영역과 친연 관계를 맺어왔다.
이러한 프레임으로 본다면 인생살이란 가면과 거울의 이중주가 엮어내는 파노라마다. 한 손엔 청기를, 다른 손엔 백기를 들고 번갈아 손을 올리듯, 가면과 거울을 수시로 바꾸며 연극배우가 되곤 한다. 요즘 SNS공간엔 공유를 가장한 가면의 언어들이 많은 자리를 차지한다. 공허한 내면을 포장하는 외피의 삶,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의 언어가 대부분이다. 거기엔 영혼 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좋아요’ 이모티콘 클릭도 한몫을 한다.
세상이 탁류에 휩쓸릴수록 문학의 언어는, 특히 수필의 언어는, 거울의 언어와 친해져야 하지 않을까. 사회적 얼굴과 본래적 얼굴 틈새에서 갈등하면서도 생존을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견디며 상처받는 영혼들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기를, 자아와 타자의 가면에 감춰진 민낯을 들여다보고 존재의 고독과 본질의 무늬를 진정성 있는 언어로 그려낼 수 있기를, 함께 깨어 그 길을 찾아 갈 수 있기를….
오늘도 또 내일도, 나는 얼마나 많은 가면과 거울 앞에서 서성일 것인가. 가면을 쓸 것인가, 거울을 볼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것이 문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