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 목성균
지름티 고개는 이제 본래의 산등성이로 돌아갔다.
마을의 서북쪽 갈뫼봉과 동북쪽의 유지봉을 이어주는 산등성이,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는 이 산등성이의 중간쯤, 산세가 기개(氣槪) 죽이고 주저앉은 자리가 지름티 고개다.
이 고개는 협촌(峽村)인 우리 마을 버들미에서 대처(大處)인 충주로 나가는 길목으로, 걸어다닐 수밖에 도리가 없던 시대에는 괴산 장에서 충주 장으로 옮겨가는 보부상(褓負商)들도 넘나들던 지름길이었다. 한때는 온 종일 인적이 끊이지 않던 큰 고개였으나, 정부 방침에 의해서 운행결손을 보조해 주는 벽지노선이 개설되고 하루 두 번씩 군내버스가 드나들더니 고개의 인적이 끊어지고 말았다.
지름티 고개뿐이랴. 전국의 고개는 교통수단의 발달과 더불어 다 사라졌다. ‘사람 사는 한 평생이 고개 하나를 넘는 것과 같으니라’ 그리 말하던 고향의 어른들도 대개 고개와 더불어 사라졌거나, 삶의 일선에서 퇴역을 하고 여생을 살아가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희로애락을 짊어지고 이 고개를 숨차게 넘나들며 원시적인 농경시대를 살아왔다.
“그래도 그 때가 좋았지---.”
불편한 삶의 시대에 대한 향수, 그것은 끈끈한 인정의 유대(紐帶)가 그리운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편리한 삶이 반드시 행복한 것만도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되는 것인데,
“내가 자네들만 할 때는 콩 한 가마니를 지고 저 고개를 넘어 충주 장에 가서 상포(喪布) 흥정을 해 오는데 불과 한 나절밖에 안 걸린 사람이여-.”
젊었을 때 힘깨나 썼다는 갑득노인이 한창시절이 그리울 때 장정들 앞에서 하는 말로서 허풍이 섞이긴 했어도 사실과 크게 어긋나는 소리는 아니다.
“참말이여, 상주(喪主)가 고마워서 술과 돼지고기를 실컷 먹으라며 날 억지로 과방 안으로 밀어 넣기까지 했다니까.”
누가 아니라고 했나, 갑득노인은 극구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흐린 눈으로 간절하게 고개를 바라보았다.
협촌의 고개는 희망과 절망의 두 모습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항상 애타게 했다.
아침 햇살이 퍼지기 전에 새벽 이슬을 걷어차며 고개를 순식간에 치닫는 사람이 눈에 띈다면 뉘 집에 밤사이에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한 것이다. 누구의 명이 경각에 이르렀든지, 젊은것이 야반도주를 했든지, 농우(農牛)가 쓰러졌든지, 이와 같은 예의 큰일이 났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선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마을 고샅에서나, 들녘에서나 습관처럼 지름티고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햇살이 퍼져 내리는 고개에 길 떠나는 사람이 없을 때 비로소 안도의 하루를 시작했다.
골짜기에 산그늘이 내릴 때도 마을 사람들은 아침처럼 고개를 바라본다. 그러나 까닭은 아침의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 아침에는 밤사이 마을의 안부가 궁금해서지만 저녁에는 마을에 드는 반가운 손님이 있나 싶어서다.
갓을 쓰고 백포(白袍)를 입은 분이 진중한 거동으로 해 그늘을 따라서 고개를 나려 온다면 그 날밤 마을 안에 기름질 냄새가 진동할 수밖에 없는, 뉘댁 사돈양반이거나, 종백씨거나, 아니면 당숙어른 같은 분이 오시는 것이다. 누구네 집에 오시는 손인지 즉시 알아차려야 한다. 그것은 협촌 사람들의 중요한 생활정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야 저녁을 뚝딱 먹어 치우고 귀한 손님이 드신 집 사랑간 한 자리를 먼저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날 밤 그 사랑간 마실에 빠진다든지 마실이 늦어서 입추의 여지가 없는 사랑방에 들지 못한다면 예사 손해가 아니다. 고개 너머 대처의 흥미진진한 세상사(世上事)를 들으며 기름진 밤참을 얻어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것이다. 다음날 두레 판에서 그 사랑간 마실이 화제에 오를 때 분해서 식식거려 봐야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꽃가마가 넘어 간 고개처럼 허망할 수 있을까. 가마가 앞서고 후행(後行)이 길게 이어져서 넘어간 저무는 고개의 적막함, 틀림없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뚫고 뜨거운 숨을 토해 내며 땅거미 질 때까지 숨어서 고개를 바라보는 총각이 있었으리라.
꽃가마가 넘어오는 고개는 기쁨이다. 고갯길의 수풀조차 술렁이면서 새 각시를 맞이하는 것만 같다. 산협(山峽)의 혼사가 어디 뉘댁만의 경사이랴. 마을의 잔치였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산협에 잡혀 와서 시집살이에 들게 된 새 각시는 한동안은 고개를 바라보며 시집살이의 애상을 삭여 내야 한다. 그래서 고개는 여인의 한이라고 했다. 새 각시는 저녁 우물 가에서 노을지는 고개를 바라보며 눈물짓지 않는 날이 없었다. 어느 새 각시는 시집온 날 혼행(婚行)을 배행하고 돌아가는 상객이 고개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대성통곡을 했고 한다. 조신(操身)해야 할 신행 날, 어린 새 각시의 경망(輕妄)이 시어머니 살아 생전 자심(滋甚)한 시집살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진달래꽃이 산비탈을 분홍치마 두르듯 하는 봄, 마을의 젊은 농군이 고개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넋을 뺏겼다면 갱갱이(김제 강경 넓은 들을 말하는 것으로 야망을 펴려고 도망을 간다는 뜻-.) 갈 놈이 틀림없지만 어른들은 만류를 하지 못했다. 산협을 벗어나서 제 길을 열어 가도록 모르는 채 하는 것이 어른 된 도리인지 아닌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젊은 그들은 진달래 꽃 피는 고개를 홀연히 넘어갔다가 고개에 눈발이 성성할 때 홀연히 넘어와서 더욱 분발하는 농군이 되었다.
몇 일 전, 나는 들일에 바쁜 농부들로부터 할 일 없는 놈이라는 질시(疾視)를 받기 싫어서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지름티 고개에 올라가 보았다.
아직 고갯길은 탄탄하고 훤했다. 긴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이 지신 밟듯 한 고갯길 아닌가. 그러나 길섶의 잡초는 길길이 자라고 있었다. 어정칠월 호미씻이 전날에 마을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새벽길 떠나는 사람의 두루마기 자락이 이슬에 젖지 않도록 이 길섶의 풀을 모두 베었다.
고갯마루는 황폐 할 대로 황폐해 있었다. 당집은 비바람에 하얗게 삭아서 기울었고, 서낭나무만 홀로 울창한데 그 앞의 돌무더기는 바위옷과 넝쿨에 덮여 있었다. 고개를 넘나들던 사람들이 두 손으로 공손하게 싸잡아 들고 와서 놓고 빌어 마지않든 소망의 무더기다. 그 소망들이 속절없이 세월에 묻혀 가고 있었다. 누구의 돌멩이는 소원을 이루고 누구의 돌멩이는 소원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원을 못 이루었다고 해서 서낭신을 원망한 사람을 나는 보지 못 했다. 소원을 들어주고 안 들어준 서낭신의 기준은, 소원의 정당성, 간절함, 진실성 등 지극히 공정한 것이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리라.
서낭신은 헌신적이다. 자기 앞에 쌓인 저 돌무더기 같은 융성이 끝날 줄 뻔히 알면서 마을에 군내버스를 들어오게 한 것으로 보아서 그렇다.
인적이 끊긴 고갯마루에 앉아서 문득 어머니를 생각했다. 다시는 개선의 여지가 없는 어머니의 생애도 조만간 고개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어머니의 신행 가마가 멈춘 자리는 내가 앉아 있는 이 자리쯤 될까.
“쥐냥이콩(질금 콩의 일종)만한 신랑이 가마의 휘장을 들치더니 머리를 들여 밀고 가마멀미가 얼마나 심했느냐는 둥 꼴값을 떨드라니까. 글쎄-.”
신부는 열 일곱, 신랑은 열 다섯이었다. 가마 틈새로 본 산협의 답답한 풍경에 어머니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데, 어린 신랑이 가마 휘장을 들치고 신부에게 혼행 길의 노고를 치하하더라는 것이다.
“거짓말 아녀-, 그 때 벌써 내가 싹수를 알아 봤어-.”
베 매는 길쌈마당의 여인네들을 박장대소케 한 어머니의 이야기는 어머니의 한이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의 삶을 등한히 하고 간간이 시앗을 두었다는 풍문을 풍기면서 고개를 넘나드신 아버지의 일방적인 삶은 어머니에 대한 독선(獨善)이다. 혼행이 멈춘 고갯마루에서 어린 신랑이 보여준 대견스러운 낭만은 당연히 어머니의 소중한 평생 추억이 되었어야 하는 것인데 평생 한으로 남고 말았다.
이제 고개는 본래의 산등성이로 돌아갔어도 한으로 삭은 젓국 같은 여인의 마음에는 부부사이를 이쪽과 저쪽으로 가르는 엄연한 분수령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