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끝에 써내는 문장/매원 박연구
내가 경험한 사실이나 들은 이야기에서-“그것 수필감이군!”하는 생각이 들면, 대강 주제도 잡히게 되고 그것을 수필화(隨筆化)하기는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소재를 가지고 좀더 극적인 이야기가 되었으면 해서 허구를 설치한다거나 다소라도 분식(粉飾)을 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 소재 그 자체에서 주제에 맞는 제재를 가지고 나의 사념(思念)을 표백(表白)하면 되는 것이어서 청탁 장수에 맞춰 써나가면 되었다. 다만 하나의 신념은 가지고 있다. 일찍이 이태준선생이 『문장강화』에서 가르쳐준 대로-수필은 자기의 심적 나체(心的裸體)이다-나의 마음의 내면 풍경을 솔직하게 토로(吐露)하되 독자이 공감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수필 쓰기를 해왔다. 그런데 고민이 있었다. 독자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독자가 내 글을 읽고 사사로운 신변의 이야기에서 뭐를 얻으라는 것이냐고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가 난감하였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문장강화』를 또 읽어보았다. 이태준 선생은 “그러니까 수필을 쓰려면 ‘자기의 풍부(豐富)’가 있어야 하고 ‘자기의 미(美)가 있어야 할 것이다”라고 친절한 조언의 말씀을 들려주기를 잊지 않은 것이 무척이나 고맙게 생각되었다.
’자기의 풍부‘와 ’자기의 미‘-이 두 가지 과제는 평생을 두고 닦아야 할 인생 수련이라고 생각하였다. 「얘깃거리가 있는 인생을 위하여」라는 수필도 쓴 일이 있거니와, 나는 나 자신의 인생을 깡그리 수필 소재로 써먹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나의 생활‘을 사랑하고 ’나의 이웃‘을 사랑하고 ’나의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의 인생을 영위해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진실(眞實)이 곧 미(美)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내가 추구하는 진실은, 시(詩)의 진실도 아니고, 소설의 진실도 아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허구라는 장치를 사용하지 않고 사실 속에서 진실을 발견하여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해보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영혼을 속이지 않고 써야만, 우선 나 자신의 구원이 가능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나의 영혼을 속이고서는 나부터도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임은 불을 보는 것처럼 확실하다. 쓰는 사람 자신부터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독자의 구원에 대해서는 아예 말할 단계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의 구원이 독자의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이 곧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말이 되겠는데, 수필 작품에 있어서 어떻게 하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겠느냐의 문제는 바로 수필의 문학성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말이나 글은 상대방에게 의사 전달이 제대로 되어야만, 말이 성립이 되고 글이 성립이 된다. 따라서 글이란 문장이 제대로 되어야만 작자의 뜻이 제대로 전달될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더욱이나 형식에 매이지 않고 쓰는 글이 수필일진대, 수필은 곧 문장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설가나 극작가도 작품을 쓸 때는 문장을 구사하여 작품화한다. 수필도 매한가지다. 그런데 같은 문장이 아니라는데 고민이 따른다. 문장은 문장이로되 개성적인 문장-인격이 배어 있는 문장-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 고민인 것이다,
미사여구(美辭麗句)의 나열이 좋은 문장이라면, 나 또한 좋은 문장을 쓰지 못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 문장 속에 진실이 담겨야 한다. 아름다운 표현 속에 진실이 담겨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을 쓰는 사람의 공통된 고민이다. 아아 어떻게 하면, 상허(尙虛)나 금아(琴兒)의 문장처럼 나도 쓸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때그때의 내면 풍경을 수필의 형식을 빌려 표현하면서 절망을 거듭한다. 나의 이 생각, 이 느낌, 이 진실을 어떻게 표현해야 제대로 전달이 될 것인가 고심한다. 이다지도 표현 능력이 부족하단 말인가. 하기야 문자를 통하여 내 생각을 전달한다는 그 자체가 불완전한 장치인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표현을 두고도 고심하게 되고, 마지막에는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나의 생각이 바르게 전해졌으면 하는 기구(祈求)의 심정이 되어 붓을 떼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