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무 / 이어령
인간이 강철로 만든 것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대립을 이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칼과 바늘일 것이다. 칼은 남성들의 것이고 바늘은 여성들의 것이다. 칼은 자르고 토막 내는 것이고 바늘은 꿰매어 결합시키는 것이다. 칼은 생명을 죽이기 위해 있고 바늘은 생명을 감싸기 위해 있다.
칼은 투쟁과 정복을 위해 싸움터인 벌판으로 나간다. 그러나 바늘은 낡은 것을 깁고 새 옷을 마련하기 위해서 깊숙한 규방의 내부로 들어온다. 칼은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을 하고 바늘은 안으로 들어오라고 호소한다. 이러한 대립항의 궁극에는 칼의 문화에서 생겨난 남성의 투구와 바늘의 문화에서 생겨난 여성의 골무가 뚜렷하게 대치한다. 투구는 칼을 막기 위해 머리에 쓰는 것이고 골무는 바늘을 막기 위해서 손가락에 쓴다. 남자가 전쟁터에 나가려면 투구를 써야 하는 것처럼 여자가 바느질을 하려고 일감을 손에 쥘 때에는 골무를 껴야 한다.
골무는 가볍고 작은 투구이다. 그것은 실오라기와 쓰다 남은 천조각과 그리고 짝이 맞지 않은 단추들처럼 일상의 생활을 누빈다. 골무 속에 묻힌 손가락 끝 손톱이 가리키는 그 작고 섬세한 세계. 그것을 지키기 위해 여자의 마음속에 입힌 무장이다. 남성의 오만한 명예욕도, 권력의 야망도 없는 세계, 골무가 지배하는 것은 넓은 영토의 왕국이 아니라 반짇고리와 같은 작은 상자 안의 평화이다.
반달 같은 골무를 보면 무수한 밤들이 다가선다. 잠든 아이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민첩하게 손을 놀리던 우리 어머니, 그리고 우리 누님들의 손가락 끝 바늘에서 수놓아지던 꽃 이파리들, 그것은 골무가 만들어 낸 마법의 햇살이다.
모든 것을 해지게 하고 넝마처럼 못쓰게 만들어버리는 시간과 싸우기 위해서, 그리움의 시간, 슬픔의 시간, 그리고 기다림의 온갖 시간을 이기기 위해서 손가락에 쓴 여인의 투구 위에서는 작은 꽃들이 피어나기도 하고 색실의 무늬들이 아롱지기도 한다.
(-우리문화박물지 중에서- 필자: 문학평론가. 이화여대교수 및 문화부장관 역임)
{독후 평}
존재를 관통하는 미학적 투시 / 최민자
골무 하나에서 이렇듯 멋진 사유를 이끌어오다니. 시적 직관과 철학적 통찰을 정교하게 치대어 유려한 문장으로 뽑아 올리는, 이어령은 언어의 연금술사다. 그의 <우리문화박물지> 안에서는 흐르는 시간보다 더 빨리 잊히고 사라져가는 일상의 옛 소도구들이 묵은 먼지를 털고 눈부시게 환생한다. 사물의 핵을 꿰뚫는 명징한 투시력, 존재의 본질을 관통하는 촌철살인의 사물시학에 나는 즐겨 무릎을 꿇는다. 어찌해야 그렇듯 성능 좋은 곁눈을 정착할 수 있단 말이냐.
어찌해야 시를 잘 쓸 수 있을까 라는 물음에 목월선생이 했다던 대답이 생각난다. 잠잘 때도, 먹을 때도, 뒷간에 가서도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라... 그게 어디 시인들만을 위한 답이겠는가.
손가락 끝의 작은 골무가 시간과 대적하는 평화의 투구로 좌정하기까지, 작가는 얼마나 치열하게 자기안의 어둠과 마주앉아 눈싸움을 했을 것인가. 완강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사물들이 섣불리 존재의 비의(秘儀)를 누설할리 없다. 단번에 백기를 들고 투항할리도 없다. 어둠속에 침잠하고 있던 물상이 정성과 열정에 감복하여 서서히 제 윤곽을 들어낼 때까지, 스스로 빗장을 열고 조곤조곤 속내를 풀어낼 때까지,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져야 했으리라. 진정성과 감정이입으로 대상을 깊이 있게 응시하면서 익숙한 사물들이 들려주는 비밀스런 이야기에 귀 기울려 화답했으리라.
15초짜리 광고 카피에도 이야기를 입혀야 잘 먹히는 서사의 시대, 범람하는 자전수필의 물살 속에서 스토리텔링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지적(知的) 성찰이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다. 200자 원고지 다섯 장 분량의 이 짧은 수필은 문장의 아름다움이 표현의 기교에 앞선, 세상과 사물에 대한 깊고 넓은 인식의 산물임을 서늘하게 환기시킨다.
(필자: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