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열 ―정지용(1902∼1950)
처마 끝에 서린 연기 따라
포도순이 기어나가는 밤, 소리 없이,
가물음 땅에 쓰며든 더운 김이
등에 서리나니, 훈훈히,
아아, 이 애 몸이 또 달아오르노나.
가쁜 숨결을 드내쉬노니, 박나비처럼,
가녀린 머리, 주사 찍은 자리에, 입술을 붙이고
나는 중얼거리다, 나는 중얼거리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다신교도와도 같이.
아아, 이 애가 애자지게 보채노나!
불도 약도 달도 없는 밤,
아득한 하늘에는
별들이 참벌 날으듯하여라.오늘은 한글로 쓰인 우리 문학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 나는 국문학과를 나왔다. 나올 때는 정신 차리고 나왔는데 들어갈 때는 그렇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이미 국문과 학생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결정적으로 국문학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 순간이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현대문학이 가난하게 시작했구나’라는 사실을 아는 때였다. 마치 집안의 가난을 알고 나서 철이 드는 아이처럼 말이다.
현대시라는 것은 시작된 지 100년을 갓 넘었다. 처음에 어땠겠는가. 사람도 많지 않았고, 말의 활용도 무르익지 않았다. 학교에서 조선어를 배우는 것 자체도 어려웠다. 그런데도 시를 썼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게다가 이런 시가 태어났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1935년 ‘정지용시집’에 수록된 작품이다. 모국어의 묘미와 매력을 최대치로 꽃피운 시집이었다. 애끓는 부모 마음도 마음이지만 저 표현의 탁월함이 우리를 전율케 한다. 애타게 자지러지는 아이와 불도 약도 달도 없는 밤의 대비라니. 간절한 아비의 시야가 흔들려 별들이 참벌 날 듯 흔들려 보인다니. 정녕 이 시는 우리가 한국어를 모국어로 가졌음을 뿌듯하게 만든다.나민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