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류, 다시 붉다 / 김영인 (2020 토지문학상)
늙은 석류나무에 다시 몇 송이 꽃망울이 맺혔다. 정원에 죽은 듯 서 있던 몸이었다. 봄꽃들의 잔치가 끝나갈 무렵 석류나무는 태아처럼 불그스레한 이파리를 살짝 내밀었다. 오뉴월 햇살 담뿍 머금으며 파릇파릇 몸집을 불렸다.
서른 끝자락에 이 집에 들어왔다. 적막한 마당에는 묵은 나뭇가지며 잡풀과 낮은 나무들이 뒤엉켜있었다. 한쪽에는 석류나무만이 하늘로 가지를 뻗친 채 푸르렀다. 뒷짐 진 터줏대감처럼 석류나무는 신혼살림 차리듯 들떠 들어오는 우리를 환하게 맞았다.
뜰에서 가장 오래 머문 곳은 석류나무 아래다. 책을 읽다가 눈이 침침해지면 그 그늘로 달려갔다. 뜨락의 꽃과 나비도 바라봤고, 담 안으로 날아든 한 마리 흰 비둘기도 지켜봤다. 구름이 그리는 흑백 그림들도 올려다보고, 도글도글 떠 있는 밤하늘 별도 헤아렸다. 알 수 없는 그리움도 꽃그늘에서 키웠다.
첫 생리혈 같은 부끄러운, 첫 키스처럼 달콤한, 연인의 목소리처럼 부드러운, 엄마 품처럼 포근한, 구름처럼 떠도는 그리움… 숱한 설렘을 불러일으켜 준 곳.
그곳에 서면 대지며 자연의 활기찬 흐름소리가 들렸다. 그것들이 내게 말을 걸기도 했다. 와락, 덮쳐오는 감성에 세포 하나하나까지 꿈틀거렸다. 살짝만 건드려도 펑! 터져버릴 듯, 몸이 달뜬 석류가 제 몸을 확 열어젖히면 처음 첫날들의 감각이 가득 차올라 내 하루도 붉었다. 중년에 막 올라버린 내게 ‘첫’의 감각들이라니.
석류나무는 갈수록 품이 넓어지고 열매도 풍성해졌다. 가지가 하늘에 닿을 듯 치솟고 무성한 잎은 반질반질 윤기가 흘렀다. 진딧물이 제 혈관을 갉아대도 마냥 싱그러웠다. 유월이면 종 모양의 꽃자루가 이파리 수만큼이나 주렁주렁 열렸다. 그 종 끝에 진한 주홍빛 꽃이 화르르 피어오르면 홍등을 밝힌 듯 마당이 환해졌다. 붉은 꽃이 꽃자루에서 떨어지면 한 시절이 하나의 열매로 완성되었다.
해마다 석류는 촘촘한 볕 속에서 열여섯 소녀의 볼처럼 탱글탱글 영글었다, 선들선들 갈바람이 일면 주체할 수 없는 빠알간 몸을 화락 열어젖혔다. 알알이 박힌 투명하고 붉은 알! 알! 알!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알, 세상 모든 것을 품어 꽉 찬 붉은 세계는 보기만 해도 충만감을 주었다.
육아, 살림, 가게, 십여 년간 일을 병행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면 자정 넘어 잠자리에 들 때까지 잠시라도 몸을 누일 틈이 없었다. 주말에는 시골 시집에 가서 일을 돕다가 일요일 늦게서야 돌아왔다. 피로에 쌓인 몸은 둘째고 마음이 점점 피폐해졌다. 더 버티면 영혼조차 스러지고 말 것 같았다. 가게 일에서 손을 뗐다.
집안일을 느슨하게 해가며 오지랖을 넓혔다. 누구의 엄마가 아닌 나라는 존재로 환한 삶을 살고 싶었다. 미련이 남은 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과 도서관을 오갔고, 문화센터며 독서 모임에도 나갔다. 사람 사이의 관계망도 넓혔다. 답답해지면 집을 박차고 나왔다. 며칠씩 산하를 돌아다니며 자유를 즐겼다. 감성이 넘쳐난 내 생의 봄날이었다.
그러는 사이 세월이 쏜살같이 흘렀다. 몇 해 전부터 석류나무는 열매를 제대로 달지 못했다. 빈 꽃자루가 마당을 뒹굴었고, 겨우 맺힌 예닐곱 개는 한쪽이 썩다가 저 혼자 툭 떨어졌다. 수확물이 없으니 효용도 미적 가치도 자연스레 줄었다. 한겨울, 때에 찌든 채 굽은 허리로 엉거주춤 서 있는 몰골은 보기에도 안쓰러웠다.
이제는 잘라버리자는 말이 남편 입에서 잦았다. 푸르게 서 있는 자체만으로도 내게 위안을 주었으므로 나는 그냥 두자고 했다. 옥신각신하다가 과실수 전지하듯 듬성듬성 가지를 잘랐다. 다음 해는 단발머리처럼 일정하게 베어냈다. 하지만 아직 멀쩡하다는 시위라도 하듯 석류나무는 곁가지를 쑥쑥 늘렸다. 더는 무용하다며 남편은 옆집 아저씨까지 불러와 허리께까지 싹둑 잘라버렸다.
갱년기에 들어선 내게 우울증이 찾아들었다. 두 딸이 떠나버린 휑한 공간에 짙은 허무가 똬리를 틀었다. 가지 끝에 새싹이 눈을 내밀어도, 나뭇잎이 갈바람에 휘날려도 감성은 깨어나지 않았다. 문학도 더는 나를 지탱해주지 못했고 어떤 잠언도 가슴까지 닿지 않았다.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시큰둥했다. 낮에는 축 늘어진 채 집안에서만 뒹굴었고, 밤이면 무언가를 찾듯 동네를 배회했다.
보아주는 이 없으니 몸단장도 하지 않았다. 푸석한 머리, 누렇게 뜬 얼굴, 흐릿한 눈동자, 목이 늘어진 셔츠, 무릎이 튀어나온 운동복, 거울에 비춰보면 추레한 석류나무 한 그루가 어정쩡 서 있었다. 이런 나를 남편은 농담 삼아 할멈이라 불렀다. 더는 붉은 월경도 열정도 없는 나를 여자로 여기지 않는 듯했다.
골방, 깊은 적막 속에 몸을 웅크렸다. 몸에 밴 습관이 요동쳤다.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필름을 되감듯 살아온 과정을 하나하나 재생해보았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모르는 길목, 살아왔지만 내 삶이 아닌 듯한 시간, 몽유병 환자처럼 제자리를 맴돌던 미로… 그 안에 내가 있었다.
몸을 한껏 웅크린 사이, 무수한 잔가지들이 나도 모르게 잘렸다. 자르고 쳐내도 손톱처럼 다시 자라던 것들, 곳곳마다 불쑥 솟아나던 잡다한 생각들이었다. 석류나무 전지하듯 누가 그 많던 욕망의 가지들은 잘라낸 것일까. 신기하게도 그것들은 닫혀 버린 생리혈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하늘이 달아오른다. 반 토막이 난 몸에 거무스름한 혹들이 잔뜩 붙어 고사할 것 같던 석류나무, 뿌리 깊은 곳에서 있는 힘껏 물기를 빨아올리고 있는가, 더위 속에서도 품을 넓혀간다. 땅의 기운이 자신을 놓아버릴 때까지 힘을 다해 꽃을 피워내겠다는 듯, 붉은 꽃망울을 늘려간다. 꽃등을 밝힌 듯 다시 마당이 환하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지만, 죽을 때까지 지켜내고 싶은 것 하나를 가지고 있으면 족할 것이다. 삶을 펄럭이게 하던 책과 문학의 깃대를 단단히 잡는다. 책장에 꽂힌 무수한 영혼들의 눈빛이 내게 쏟아진다. 생의 나날이 한 줌 다할 때까지 붉게 살라며 위로를 건네는 듯하다.
문을 열고 나가 석류나무 아래 선다. 잔가지 한 가닥 당겨 생기 물씬한 나뭇잎을 만진다. 무성한 잎 사이에서 꽃망울 슬쩍 고갤 내민다. 솔솔 바람이 뺨을 스친다. 다시 붉은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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