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때는 / 하정아
외로울 때, 나는 냄새를 맡는다. 어렸을 적에 마음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던 냄새, 두 눈을 감으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는 냄새, 모과에서 나는 아스라한 냄새, 탐스러운 국화 송이에서 나는 아득한 냄새, 노란 호박과 팥을 으깨어 만든 죽에서 나는 달큼한 냄새.
외로울 때, 나는 조용하고 차분해진다. 독립적이고 강해진다. 남에게 의존하거나 부탁하지 않는다. 냉정해진 의지에 힘입어 결심을 실천하는데 용감해진다. 버려야 할 일들의 정리가 훨씬 쉬워진다. 생각이 명료해진다. 나의 삶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나 혼자 걸어야 하는 길임을 뼛속 깊이 깨닫는다.
마음을 무겁게 하는 모든 일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선다. 간섭하고 싶었던 일, 관심과 호기심을 일게 했던 일이나 사람들로부터 신경을 거두어들인다. 참 이상하다. 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던 일들이 ‘이제 그만, 상관하지 않겠다.’라고 마음먹는 순간, 일시에 하찮은 것으로 바뀐다. 평소에 중요하다 생각했던 것들의 의미가 퇴색한다. 맘 한번 바꾸면 세상이 달라진다.
행동반경을 좁힌다. 이미 만들어진 약속은 취소하거나 뒤로 미룬다. 새로운 만남이나 일거리를 만들지 않는다. 전화선을 내리고 이메일을 열지 않는다. 인터넷을 차단하고 텔레비전을 끄면 고립된 적막이 사방에 가득 찬다. 21세기 도시 한복판에서 원시적인 슬픔이 아늑하게 밀려온다.
말을 줄인다. 하고 싶었던 말, 참기로 한다. 변명하지 않는다. 변명만 하지 않아도 말 수를 상당히 줄일 수 있다. 불평만 없애도 고요한 시간이 급격히 늘어난다. 일단 말을 자제하면 말 수 줄이는 일이 점점 쉬워진다. 내뱉는 말에 의식을 심어두면 일체 말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찾아온다.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워진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목표를 세우고 실천한다. 직장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직업상 꼭 필요한 말만 하고 사적인 감정 표현을 열 문장 이하로 줄인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다섯 문장 이하로 말한다. 생각 없이 홍수처럼 말을 쏟아내던 다른 날에 비하면 하루가 알뜰하다.
말을 많이 하지 않으면 듣는 말도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그런 날 밤 침대에 누우면 흐뭇하다. 상처를 훨씬 덜 받았다는 느낌이 든다. 마음의 상처는 대부분 말로 인한 것임을 다시 체험한다. 언어를 매개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얼마나 큰 에너지 소모인가. 침묵하다 보면 말하는 행위가 얼마나 영혼을 피곤케 하는 일인지 새삼 인식한다.
삶의 에너지가 바닥날 때 외롭다. 그 감정은 언제나 아픔을 동반한다. 외로울 땐 정말 마음이 함께 아프다. 손가락과 발가락을 통하여 통증이 스멀스멀 기어들어 온다. 몸살 한다. 이때는 철저히 아파야 한다. 어설프게 피하려 하면 오히려 시간만 더 늘리는 셈이 된다.
외로울 땐 좋아하는 사람들도 찾지 않는다. 변명하거나 충고를 듣고 싶지 않아서다. 대신 자연을 찾는다. 자연은 비난하지 않고 가르치려 들지 않고 조용히 보여주고 들려준다. 보고 싶지 않으면 눈을 감고 듣고 싶지 않으면 귀를 막으면 된다. 외로울 때, 사람을 피하여 자연 속에 숨는 이유이다. 상처 입은 마음이 가만히 싸매지는 것을 감지한다.
외로울 땐 바다에 자주 간다. 인생이란 밀려왔던 파도의 끝자락이 물러가기 직전 잠깐의 멈춤과 같다는 의식이 가시화된 현장을 목격한다. 산도 즐겨 찾는다. 산등성이에 올라 그의 마음을 접하노라면 삶이란 착하고 선한 것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 그것조차 품어 안음으로써 아름다운 하나가 된다는 것을 잠언으로 듣는다. 나무와 풀이 공간을 공유하되 삶은 각자의 몫인 것처럼 외로움이란 살아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품어 안아야 할 삶의 대가임을 배운다. 나의 외로움은 그러니까 고립이 아니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성장의 한 단면임을 깨닫는다. 일시에 찾아오는 평안에 심호흡이 난다.
마음을 어지럽히던 문제들을 꺼내어 일렬로 줄을 세운다. 교통정리 시간. 하찮은 것 때문에 소중한 것들이 방치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옥석을 가리듯 소중한 일과 사람을 추려낸다. 인연을 털어내는 일, 인연을 잘라내는 일, 인연을 내려놓은 일은 쉽지 않지만, 정리가 되면 홀가분한 자유를 준다. 결심이 마음에서부터 받아들여지면 평안하다.
사랑의 근원을 묵상하면 오리무중이던 상대의 의도가 선명하게 드러나다. 사랑은 상대를 아프게 하는 이기적인 감정이 아님을 깨닫는다. 감미롭고 부드러운 언어의 나열이 아니라는 것도 인식한다. 참사랑과 거짓 사랑을 구분하고 나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외로울 때는 감정이 안온해진다. 태풍의 눈 안에 들어앉은 듯한 고요와 침묵이 있다. 불안하고 고통스럽지만 달콤하다. 더는 내려갈 깊이가 없을 만큼 바닥에 내려앉은 상태가 좋다.
외로울 때, 조병화 씨의 시가 생각난다.
“얘, 너 뭐 그리 생각하니/사는 거다/그냥 사는 거다
슬픈 거, 기쁜 거/너대로/ 다 그냥 사는 거다/잠깐이다.”
이 시를 가만 읊노라면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위로가 된다.
외로울 때, 나는 냄새를 맡는다. 여름날 땀이 살짝 밴 할머니의 모시 적삼에서 나던 냄새, 잘게 썬 담뱃잎을 할머니의 곰방대에 채워 넣어드릴 때 맡았던 냄새, 따끈따끈한 소여물에서 올라오던 냄새.
외로울 때면 노을처럼 적막한 거실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그리운 냄새를 찾는다. 외로움이 조금 가시는 것 같다. 어느 땐 냄새에 대한 향수로 더 깊이 외로워지기도 하지만 그 쓸쓸한 느낌이 좋다.
외로울 때, 가만히 내버려두면 나는 절대 울지 않는다. 지구력 또한 강하다. 2~3일쯤 앓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훌훌 털고 일어난다. 누구도 내가 외로움으로 몸살 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 외로운데, 혼자 있고 싶은데, 그리운 냄새를 찾고 싶은데, 그런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고 사람들이 나를 귀찮게 할 때, 의지는 그만 박살이 나고 나는 결국 울어버리고 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