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유언 / 김진태
채만식(蔡萬植) 님은 탁류(濁流)의 작가다. 한때 우리 문단에 독특한 문체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소설가다. 그는 한평생을 글을 쓰며 살았고, 책을 가까이하며 작가 생활을 계속한 분이다. 이 작가가 생전에 가장 사랑한 것은 아들 병훈(炳焄)이었으며, 좀 어릴 때는 늘 무릎에 앉히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 것을 그 아들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회상한다는 것이다.
채만식님이 철이 든 아들 병훈에게 남긴 말이 있다.
“절대로 책을 가까이하지 말아라, 교과서 외에는 읽지 말아라.”
다른 사람도 아니다. 한평생을 책에 싸여 살았고, 적지 않은 책을 써서 남기고 간 분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에게 남긴 말인 점에 다시 씹어 봄 직한 여운이 있다.
결국 자기의 경험에서 얻어진 절실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책을 가까이 하며 산 탓에 남들은 기를 펴고 잘살아 가는 세상에서 늘 군색하고 쪼들리는 생활을 했다는 뜻으로 풀이가 된다.
아닌 게 아니라 공감이 간다. 현실적인 안정된 생활로 한평생을 그럭저럭 보내려면 책을 가까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책을 가까이하면 이성이 가을 공기처럼 맑아진다. 맑은 이성의 공기 속에는 속된 허욕이 뿌리를 뻗지 못한다. 그냥 본능적인 욕구에만 충실하게 살아갈 수가 없다. 모두들 떠받들고 못 얻어서 충혈된 눈망울로 법석대는 것이 시시하게 비치게 된다. 지금 있다 다음 시간에 흔적도 없어질 것에 연연하게 매어 달리기를 시금털털하게 여기게 된다. 사물을 바깥 눈으로 보려 하지 않고, 마음의 눈으로 보게 되며, 바깥 눈으로 보아 현란하게 빛나는 것들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겨 거들떠보려 하지도 않는다. 모두가 그게 그거고 별것 아니게 여겨져서, 현실에서 자꾸만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관망하기를 좋아하게 된다.
지금의 형태를 그대로 보려 하지 않고 종말의 상태로 보려 든다.
20세의 관능이 번지르르 흐르는 연인을 몸뚱이대로 대하지 않고, 40년 뒤, 50년 뒤의 주름살 잡힌 쭈그러들 가변성의 몸인 것을 내다보며 담담해진다.
책은 때가 끼는 양식(良識)을 자꾸 맑게 닦아 낸다. 이끼가 끼어 안이(安易)와 타협하고, 세속에 떠내려가며 개성의 모가 깎이어 두리뭉실한 형태로 되려는, 이성을 개성의 모가 서게 하여 날카로운 송곳으로 만든다. 날카로운 이성의 송곳은 모든 위장된 권위와 허세의 속을 찔러서 거짓과 더러움의 속살을 드러내게 한다. 작은 실리의 방석을 놓지 못하던 허리를, 덕을 생각하는 자리로 옮겨 앉게 한다. 땅을 탐내어 땅 위만 더듬고 살피던 눈을, 의(義)의 푸른 창공을 그리는 눈으로 끌어올린다. 누런 황금빛에 황홀해하던 가슴이 의로운 일에 따르고 이치에 바른 일에 따르게 되며, 탐욕의 너울에 출렁이며 항상 안정된 때를 가져 보지 못하던 심장이 바람 없는 호수처럼 잔잔해진다. 본능적인, 세속적인 소인의 속성에서 이성적인 더 높은 가치의 추구를 일삼는 군자의 속성으로 승화된다.
채만식님이, 사랑하는 아들이 남부럽지 않게 한평생을 잘살게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책을 가까이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것은 이해되고도 남는 부정(父情)이다. 그러면서도 짧은 인생을 영원한 예술로 비약시키려던 작가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한평생을 실재(實在)아닌 실재를 대상으로 하여 고지식하게 일하며 낭비하는 속물의 존재로 살기를 바랐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차피 한 생이다. 잘 먹고 거드럭거리고 살다가 가자는 생각, 물론 탓할 것이 아니겠다. 시정(市井)을 메우는 인파가 대개 이런 현실주의의 추종자들이다. 흔해 빠진 존재며 가치의 유무를 따질 것도 없는 속된 존재들이다. 학자들이 분류한 형에 따르면 저급 가치, 감성적 가치의 추종자들이며, 인류의 대부분을 포용하는 가장 넓은 길이다.
가치는 어느 것이나 우리들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이며, 요구에는 자연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있다. 만일 사람이 자연적인 요구에만 만족을 느끼고 더 이상의 요구를 안 한다면, 동물과 별다름 없이 살다 가더라도 아무 유감이 없었을 것이며, 가치의 높고 낮고를 따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적인 요구의 만족으로 만족 못하는 사람인 점에, 생각하는 갈대로서의 숙명적인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 이런 뜻에서 인간이란 ‘완성된 인격’ 이란 한없이 높은 목표를 쳐다보고 자라는 나무라 할 수 있겠다. 살아 있는 한 성장을 멈출 수 없는 나무다. 성장을 멈추었다면 이미 살아 있다는 체온이 식은 나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의무적으로 성장해야만 한다는 것이며, 성장해야만 한다는 것은 불완전한 상태인 존재라는 뜻이 되겠다. 불완전한 존재는 완전에의 괴로운 발돋움이 있어야 하며, 이 발돋움은 역시 힘에 겨운 싸움이 되기 일쑤다. 결국 산다는 것은 괴로운 싸움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괴로운 싸움이기는 하지만 내면적으로 성장하고 풍부하게 되고 완성으로 점점 가까워졌을 때 깊은 행복을 느낀다. 이런 깊은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면 아무리 그럴싸하게 떠벌리고, 오래 살고, 박수와 갈채 속에 묻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냈다 할지라도 불쌍한 동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가장 깊은 행복감은 가장 고귀한 대가를 요구하며, 남이 모르는 피눈물의 고뇌를 넘어서야 얻어지는 것이다. 역시 인생은 에누리 없는 엄숙한 도장이다. 나이가 거듭할수록 긍정의 계수가 높아지며 천운의 건재를 새삼 느끼게 된다. 섭리의 엄격함에 고개가 수그러진다.
쉽고 편안하고 화려한 넓은 길보다, 험하고 고되고, 벅찬 가치 추구의 좁은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다. 채만식님이 이 글을 읽는다면 무척 못마땅하게 여기겠지만 나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딸들에게 죽는 날까지 책을 놓지 말 것이라는 것을 유일한 유산으로 남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