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치열성과 여유 / 정목일
수필을 ‘마음의 산책’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대개 수필은 삶의 절박성, 치열성에서 한 걸음 비켜서서 관조, 회고, 달관, 사유, 취미 등을 담아내고 있는 모습이다.
삶의 치열성, 노동의 현장, 시대정신, 역사의식, 사회 문제 등 실제로 삶과 직결되는 문제와는 동떨어진 주제와 소재에 매달려 있는 듯 보인다. 삶의 주제어가 ‘지금, 여기, 오늘’이어야 함에도, 과거 지향의 회고가 태반을 이루고 있다.
수필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인생의 발견과 의미를 담는 문학이다. ‘체험’이란 과거의 소산이기에 과거 문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시, 소설, 동화, 희곡 등에서 삶의 중심을 관통하는 현장과 문제들을 펼치는 것과는 달리 현실 문제엔 관심조차 나타내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인다.
현실 문제를 분석하고, 그 속에 살아가는 삶의 형태나 상황을 보여주지 못한다. 문제 해결의 의식과 작가 의식, 시대정신의 결핍을 느낀다. 물론 자연 감상이나 신변잡사를 통한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담으려는 소박한 의도가 깔려 있다. 그러나 노동의 땀 냄새, 일터의 현장과 애환, 삶의 치열성이 담긴 수필을 찾아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수필은 본질적인 일을 외면한 채 취미, 산책, 회고 등에 빠져 있어도 좋다는 말인가. 담담하게 은근하게 다가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런 빛깔과 향기를 내는 것만으로 만족할 것인가. 근원적이고 강렬한 메시지를 피하려고 한다.
수필은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논픽션이다. 자신의 삶과 인생을 담는 문학이다. 그런데도 수필집에 정작 삶의 현장과 모습이 빠져 있음을 목격한다. 농경 시대와 산업 시대를 지나 정보 시대에 살고 있는 현실을 망각하고, 농경 시대의 정서와 의식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지향적인 의식 체제에서 현재와 미래지향의 의식체제로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산책이나, 회고조의 글이 아닌 본격적이고 치열한 문학 형태를 보여주어야 한다. 삶의 주변문학이 아니라, 삶의 중심문학이 돼야 한다.
수필이 삶의 중심과 현실을 다루지 못하고 한가로운 취미나 여행, 회고조의 토로와 에피소드에 머물고 만다면 수필인구가 증가하고 밢되는 수필 양이 많다고 할지라도 주변문학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현실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쳐서 분석하고 해결해 보려는 작가정신을 보여주는 작품의 출현이 있어야 한다.
수필은 시, 소설, 희곡 등 픽션과는 달리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어 놓은 채 현실 문제를 고감하게 파헤친다거나 삶의 현장과 시대정신을 구현하기가 어렵다는 것도 인정한다. 또한 분량에서도 광범위하고 심도 있는 테마를 수용하기 적절하지 않다는 점도 있다.
중요한 것은 수필이 삶의 핵심, 인간 문제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치열하고 뜨거운 작가정신을 투입해야 하며, 인생 산책과 한가한 토로 방식의 글쓰기에 대하여 재고해 보아야 한다.
평생 꽃을 테마로 한 수필가, 한국미의 별견에 매달리는 수필가, 자신의 전문 테마에 일생을 건 수필가도 없지 않다. 또한 인생의 문제를 미시적인 시각으로 보지 않고, 한 걸음 비켜서서 거시적인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문제의 핵심을 보다 정확하게 보여줄 수도 있다. 수필의 화법은 직접적이라기보다 은유적이고 간접적인 방법이 더 유용할 수도 있다.
삶의 현장과 현실 문제를 어떻게 수용하여 담아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수필가가 보이지 않는다. 작업복 차림의 흙내 나고 땀에 저린 수필, 일터의 숨결과 긴박감이 느껴지는 수필, 오늘의 시회상과 이에 대한 고발, 정의와 부조리, 양심에 대한 가책과 고백, 삶의 생생한 가록과 현실 직시가 보이는 수필들이 나와 시대의 현실을 증언하고 표현해야 한다.
이제 수필은 삶의 주변부를 맴돌아선 안 된다. 삶의 심장을 느끼고 우리가 서 있는 현장, 오늘에 처한 현실의 중심에 서서 인간의 삶을 표현해야 한다.
취미나 영유나 산책 정도의 의식으로 수필을 쓸 때는 지났다. 그것은 아마추어문학 시대나 할 일이지 않은가. 이젠 수필은 이 시대에 가장 각광받는 대중적인 문학이 된지 오래다. 수필은 수필가들의 전용물이 아니다. 고학력 시대인 현대엔 모든 사람이 수필을 통해 자신의 삶을 기록한다. 인터넷이 글쓰기의 일상화, 수필의 생활화를 가져오는데 기여하고 있다.
수필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전문 세계와 개성을 확보해야 한다.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와 치열한 작가 정신, 탐구와 몰두의 땀이 요구된다. 시대와 현실의 한 복판에서 삶을 수용하는 문학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