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수 없어 다행이다 / 김수인
고흐의 그림 <밀 짚단>을 보고 있다. 알곡이 오달지게 붙은 밀 짚단 세 개를 한데 묶어 빈들에 세운 그림이다. 세계적인 명작 <밀 짚단>을 감상하는데 왠지 내 눈엔 고단한 내력만 어른거린다.
밀알은 많은 종자를 얻기 위해 제 한 몸 썩히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란 듯 견뎠으리라. 서릿발 세운 겨울 밭에서 시린 발을 동동거리며 잔뿌리를 키웠고, 봄비를 흠뻑 들이키며 양분을 잣아 올렸을 테다. 빈 대궁으로 바람에 휘청거리면서도 알곡만은 토실하게 영글기 위해 무진 애를 썼을 터이다. 나는 지금 그림 앞에서 옹골찬 밀단을 탈곡기에 들이대는 작업을 상상한다. 순식간에 알곡은 떨어지고 빈 짚단만 남는다. 내 허리마저 쭉 펴지는 느낌이다.
몇 년 전, 큰아들이 결혼해서 분가를 하자 지인들께서 허전하지 않느냐고 심심찮게 전화가 왔다. 그럴 때마다 서슴없이 “속 시원하다. 훨훨 날아갈 듯하다.”고 명쾌하게 답을 했더니 “좀 맥 빠진 목소리로 말 할 수 없나? 아들이 들으면 서운하겠다.”고 질책을 했다. 그들은 혼기를 넘긴 서른 중반의 이들을 한 집에서 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르는 성싶다. 난들 삼십 년 넘게 한 솥밥 먹고 지낸 아들의 빈자리가 왜 허전하지 않을까. 텅 빈 아들 방을 하릴 없이 들락거리며 남겨둔 옷가지에서 채취를 맡기도 하고, 해가 저물면 퇴근하는 발걸음을 공연히 기다리기도 한다. 혹한에 강변을 걸으며 마른 나무 우듬지 위에 얹힌 까치집을 쳐다보며 아들 집도 저처럼 추울까 괜한 걱정도 한다.
하나 짝을 만나 제 둥지로 날아갈 때가 되면 보내야 마음이 편하다. 책임과 의무를 훌훌 벗어버린 어깨가 이렇게 홀가분할 수 없다. 움츠렸던 내 어깻죽지가 펴지는 느낌이다. 이젠 어딜 가도 걸림 없이 떠날 수 있다.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심장마비로 이 세상을 떠난다 해도 눈 감고 갈 수 있어서 좋다.
친구들과 차를 마시면서 딱히 할 말이 없으면 이런 말을 내뱉곤 한다.
“누가 나에게 마술을 걸어 젊은 날로 돌려보내 준다고 하면 절대 응하지 않겠다.”
잠재의식 속에 가득 채워진 편안함이 발설기관을 통해서 스스럼없이 나오곤 한다. 빈 대궁 같은 몸으로 자식을 키워내는 게 버거웠다. 바람결에 휘청거리면서도 뿌리만은 뽑히지 않으려 애를 썼고, 체관을 통해 이삭을 살찌우면서도 쭉정이가 될까봐 걱정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귀여운 짓도 많이 했지만, 젊은 날은 생각이 깊지 못해 실수가 많았고 체험 없이 부딪혀 상처도 많이 받았다. 학기마다 등록금과 하숙비 보내려면 허리가 휘청했고 혹시 나쁜 길로 들까봐 마음 놓을 수 없었다. 돌이켜보니 그런 게 쌓여 푸른 시절로 돌아기기 싫은가 싶다.
이젠 훌훌 털어버린 빈 짚단도 돌아가야 할 준비 기간이다. 열매를 맺고 수확하느라 정신없이 살다가 훌쩍 떠나기엔 조금 아쉽다. 혹사만 시키다 생을 마무리 하는 건 자신에게 미안하다. 만추는 풍요로우면서 한가하다. 이젠 휑한 들판에서 마른 풀잎 써걱대는 소리에 가슴 베어도 쓰라림이 덜하다. 홍시 빛 노을 흥건한 저녁하늘 바라보며 색조의 배합에 감탄하고, 끼룩끼룩 날아다니는 철새들의 자유를 부러워하며, 추적추적 겨울비 내리는 닐엔 나목들의 시린 가지를 가슴으로 보듬는 여유가 있다. 물비늘 거칠게 이는 강물에서 헤엄치는 청둥오리를 보면 공짜 밥은 없다는 걸 늦게나마 깨닫기도 한다. 온전한 내 심장을 가동시키며 사는 것이다.
곰팡내 나도록 묵혀둔 본연의 정서를 꺼내어 거풍을 시키는데, 어느 날 아들이 찾아와 어머니는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물어왔다. 우울증이라도 생길까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그 말을 얼른 받아 “내 걱정 하지 마라. 너희들 갈무리하고 나니 날아갈 듯 홀가분하다. 나이 듦이 이렇게 좋은 줄 알았더라면 세월을 앞당길 걸 잘못했다.”고 했더니 그 말이 신기한지 눈을 크게 뜨고 어미를 바라본다. 이해가 안 되는 눈치다.
나는 되레 갈 길 아득한 젊은이들이 안쓰럽다. 비싼 아파트 대출금 갚아야 하고 경쟁 치열한 직장에서 남보다 월등한 이윤 창출을 내야하고, 금싸리기 같은 자녀 키우고 무거운 교육비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연금 고갈 운운하는 불안한 보장제도 때문에 노후준비까지 스스로 해야 하니 우리보다 훨씬 고달파 보인다. 젊은이들이 황막한 사막에서 모래바람 마시며 걸어가는 나그네들 같다. 나 빈 짚단은 결코 푸른 계절로 돌아가지 않겠다. 돌아갈 수 없어서 다행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