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밭에서/ 최민자
밭둑에 머리를 처박은 파들이 일사불란하게 물구나무를 선다.
철심 하나 박지 않은 몸뚱이 시퍼런 창끝이 허공을 조준한다. 허리를 굽히지도 목을 꺾지도 않는다. 매운 눈물 안으로 밀어 넣고 하늘을 향해 똥침을 날리다 급기야 유리 공으로 주먹질을 해댄다. 속빈 대궁 끝에 방울방울 매달린 방사형의 유리폭탄, 에로틱하다.
허연 실뿌리 몇 가닥 찔러 넣고 수직으로 용솟음치는 저 싱싱한 발기력. 뼈대 없이 솟구친다는 것은 얼마나 발칙한 중력에의 도전인가. 도심에 빼곡한 고층 건물도 골조 없이는 올라가지 못한다. 목숨의 저 안쪽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홀연한 직립 의지에 빚지지 않은 탄생은 없다.
파밭에 서면 꽃 진 나팔꽃 같은 나도 푸르게 흙 기운을 빨아올리고 싶어진다. 해거름 밭둑에 머리카락 반쯤 파묻고 서서, 퇴각하는 세월 뱃구레라도 오지게 한번 발길질해보거나, 줄지어 도열한 유리 폭탄들, 푸른 화염병들 쑥쑥 뽑아 들고 멀어지는 젊음의 뒤꽁무니를 향해 통쾌하게 투척해 보고도 싶다. 어퍼컷 한 방 날려보지 못한 인생. 도망가다 붙잡혀 패대기쳐져도 크게 억울하지도 않을 것이다. 생의 시계추를 내려 당기는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기우뚱기우뚱 기울어지다 종국에는 수평으로 들어 누워버리는 것. 수평이 아닌 수직으로의 저항에서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의 투항. 목숨의 문법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니냐며 머리 풀고 밭둑에 드러누워서 속 빈 대파처럼 푸르르 웃고 싶다.
* 최민자
전주에서 태어났다.《에세이문학》으로 등단하고 (1998), 현대수필문학상, 구름카페문학상, 펜 문학상, 윤오영수필문학상 및《에세이문학》사와《에세이스트》의 ‘올해의 작품상’을 다수 수상하였다. 수필집《손바닥수필》,《꼬리를 꿈꾸다》,《열정과 냉정사이》,《흰 꽃 향기》등이 있다.
수필집 : <꿈꾸는 보라>,<낙타이야기>,<손바닥 수필> 등
<성민희 선생님의 추천작품>
최민자님의 <손바닥 수필>은
"범상한 일상에서 건져 올린 범상치 않은 쉼표들,
서성이는 시간의 포스트 잇 같은 짧은 글들을 주로 엮었다. "
라는 평을 듣습니다.
읽으며
밑 줄을 마구 그었던 기억이 납니다.
에리한 작가의 관찰력과 대단한 표현력에 감탄합니다.
이렇게 짧은 글에 어떻게 파에 대비해 인생을 말할 수 있는지,
작가는 통찰력이 정말 깊은 것 같습니다.
글쓰기에 자극을 주는 글, 감사합니다.
아, 놀라울 따름입니다.
짧은 수필은 한 문장을 압축하는 기술인데 놀라운 상상력과 창의력이 돋보입니다.
최민자 선생님의 글에서 많은 생각이 오고 갑니다.
첫 문장이 중요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더욱 깨닫게 되었습니다.
'밭둑에 머리를 처박은 파들이 일사불란하게 물구나무를 선다'라는
첫머리 글을 올리기까지 얼마나 고심한 흔적이 있는지를,,,
최민자 선생님은 수필계의 반짝이는 귀한 보석이에요. 정말 멋져요!!
수필가 피천득 선생님은 생전에
최민자의 수필을 일컬어 “최민자의 글에는 인생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이 들어 있고,
흔들리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유연성이 있습니다.
세상을 꿰뚫어보는 날카로운 예지도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날카로움은 남을 찌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생, 사물의 이치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의 글은 정적이면서도 또한 지적입니다.
반짝이는 예지, 조금만 드러낼 줄 아는 자제력,
정제된 언어 그런 것들로 해서 그의 글은 아름답습니다.
그의 글에 대해서라면 나는 어떤 찬사도 아끼고 싶지 않습니다”라며
말씀하셨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