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가 쓴 수필>
섬인 채 섬으로 서서 / 변해명
남해 바다는 파도의 여운조차 없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늘을 닮은 바다, 바다를 닮은 섬들, 그리고 섬 기슭에 정박한 작은 배들은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했다.
나는 일찍이 바다를 보았지만 이처럼 아름답고 아기자기하고 이야기가 담긴 바다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남해는 처음인데 내가 태어나고 살았던 고향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언제고 돌아와 쉬고 싶은 마음을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남해 바다엔 파도가 없었다. 파도가 없는 바다는 격정이나 격렬함이 없었다. 그립고 안타깝게 기다리며 애태우는 흔들림이 없고 마음을 비운 넓은 가슴과 흔들리는 모든 것들을 표용하고, 따뜻함으로 머무르게 하는 몸짓만 있어 보였다. 그 앞에서 오랜만에 도시를 잊을 수 있었다. 도시의 냄새를 털고 도시의 생각을 털고 온통 푸르기만 한 세상 속으로 들어가 바다의 일부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도시의 바다에서 서성거렸다. 그 바다에는 파도가 높아 그 파도 속에서 파도를 타며 일상을 풀무질했다. 파도는 나를 잠시도 쉴 수 없도록 아픔에 뒤채이게 했고 격렬한 몸짓으로 질주하게 했으며 한사코 해변으로 다가서게 했다. 그런 몸짓이 덧없고 또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바다에서 그 몸짓을 그만 두지 못했다. 그 흔들림, 질주, 고뇌 그런 것들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배를 젓는 어부의 억센 팔뚝처럼 흔들림에 의지하여 그 모험과 자극을 밀어내며 광대처럼 살아왔다.
나는 남해 바다에서 그것을 버렸다. 50의 고개를 넘어선 장년의 가슴처럼 휴식과 처연함과 넉넉함을 지니고 있는 바다에서 언제나 섬으로 떠돌던 외로움도 달랠 수 있었다.
남해 바다는 섬들을 쓸어안고 섬들을 어르며 가슴을 열고 있었다. 그 너그러운 표정이 그 바다의 많은 섬들조차 외로워 보이지 않게 했고 나의 외로움조차 지울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우리 일행을 안내하던 김 선생님은 그런 내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바다가 잘 보이는 이곳저곳으로 자리를 바꾸며 술잔을 거듭하듯 바다에 취하는 기분을 만끽하게 했다. 어느 날, 훌쩍 도시를 떠나 남해로 돌아간 그분의 얼굴에는 이미 도시의 먼지가 없었고 해풍에 그을은 모습이 바다를 닮고 있었다.
바다를 지켜보는 동안 해가 서서히 바다로 내려오며 푸른 캔버스에 붉은 물감을 뿜기 시작했다. 낙조를 에워싸고 흩어지는 바다는 모성의 빛을 연출하고 있었다.
일출의 빛과 일몰의 빛이 하나의 모성의 빛이라면 태어난 곳과 돌아갈 곳이 하나의 모성의 품임을 생각하게 한다. 바다로 돌아가는 일몰의 여운이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니. 우리 삶도 저렇게 아름답게 저물 수 있기를 옷깃을 여미며 기원해 보았다.
파도는 남해바다에 둥지를 틀고 태어나 먼 바다를 향해 질주하다 방랑과 자유를 만끽하고 , 덧없고 허망함을 깨닫자 비로소 초연한 모습으로 돌아와 모성의 품에 안긴 것일까. 이 바다에서 일출을 보고 떠난 사람이 지금 돌아와 일물을 보고자 함은 파도와 같은 몸짓일까.
우리의 그림자도 길게 눕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온종일 서로가 마주 보며 끝내 손잡지 못하는 아픔을 안고도 언제나 그랬듯이 두 팔을 벌리려는 섬들도, 아슬아슬하게 외나무다리를 건너며 서로 다가서려 했던 섬들도 저마다 가슴을 여미고 어둠 속에 윤곽을 그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섬들이 안고 있는 고독으로 보였다. 아무리 바다가 가슴을 열고 그 품에 안으려 해도 안길 수 없는 섬들의 고독. 그것은 내가 바다 위에서 나를 처음 보는 것 같은 아픔이었다. 저 섬들처럼 나도 하나의 섬으로 서 왔다. 한사코 두 팔을 벌려 손잡고 싶어 가슴을 태우고 다른 섬 곁으로 다가서려던 서성임. 나는 바다의 섬들을 보며 섬이 지닌 고독을 확인한다.
기슭에 등을 대고 정박한 소년의 배도 어둠을 가득 싣고 고요한 일몰을 맞고 있었다. 이제는 서두름도 설레임도 없이 해변에 누워 하늘만 보는 배는 그 많은 추억의 편련들로 해서 위로를 받는 것 같았다. 소년은 그 배를 보며 길고 힘들던 항해를 되돌아보리라.
나는 어릴 때 부르던 노래가 생각이 나서 소년의 배를 향해 나직이 불렀다.
“내 나이 어릴 때 내 입은 가볍고 바다 위에 떠돌기 나 참 원했네. 지금 남천 바라보면 늘 들리는 소리 그 작은 뚜나 나를 부르네….”
판도라의 상자를 소중히 안고 있는 소년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반짝인다. 그에게서 싯달타에게 ‘강물의 노래’를 불러주던 노인의 모습을 발견하고 숙연해졌다.
해가 지고 있었다. 그 고요하고 아름다운 바다도 어둠 속으로 지워지고 있었다. 섬들도 그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남해의 숨결이 나를 삶의 끝까지 밀어내고 당기는 동안 어둠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제 나는 돌아가 나의 바다의 파도를 잠재우려 할 것이다. 섬인 채 섬으로 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일몰이 오기 전 한 척의 작은 배를 내 바다기슭에 대어보려 할 것이다.
어디선가 채나물새가 밤을 썰고 있었다.
변해명 (邊海明)
<문학가. 현대문학가. 수필가 >
서울출생.<한국문학> 수필 등단.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졸업.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수필문우회 회원,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등을 역임.
수필집 '먼 지평에', '외로운 영혼에 불을 밝히고' 등 다수
수필선집 '그림자 춤', '주인없는 꽃수레',
4인수필집 '시간의 대장장이'.
수상;'한국문학상', '심곡문학대상', '수필문학상', '현대수필문학상'
수필쓰기는 사진 찍기가 아니라 초상화 그리기와 같다.
내 모습을 사진에 담았을 때와 초상화로 그려졌을 때의 모습은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보게 된다. 사진은 나의 사실적인 모습의 복사지만 초상화는 내 얼굴의 특성을 가려 화가의 상상력에 의해 재현해낸 모습이다. 어느 부분은 생략되고, 어느 부분은 강조되고, 나의 개성을 잘 들어내는 부분을 찾아 특징을 살려 나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이다. 즉 내 초상화는 화가라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 창작해 낸 작품인 것이다. 그 초상화의 모습도 사진의 모습처럼 틀림없이 내 모습이지만 사진과 달리 초상화에서는 그린 사람의 의도가 개성과 상상력과 창조정신과 함께 들어나게 된다.
수필이 작품이 된다는 것도 경험의 소재를 가지고 자신이 표현해 내고자 하는 내용을 상상력에 의해 작가의 의도가 문학어로 재구성될 때 작품이 된다.
<변해명-수필에서의 체험과 상상력 중에서 일부 발췌>
<유숙자 선생님의 추천 수필
제목 자체로도 강한 끌림이 있습니다.
작품의 제목을 정하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글의 내용이 담겨야하고
주제를 은유적으로 풍겨야하고
독자의 마음을 확 잡아끌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어서겠지요.
하나의 풍경화를 보는 듯한 수필입니다. 풍경화지만 그 내면은 인간의 고독과 성숙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안고 있는 생각, 아니면 우리 모두들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 모든 공감하는 것을 표현해 내었습니다. 그 모든 욕심과 성취하려는 것도 결국은 먼 훗날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섬들을 쳐다 보고 그들의 고독을 바라보며, 결국 인간은 섬과 같이 된다는 것을,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남해 바다의 섬을 바라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기를----
작가가 쓴 수필에 공감합니다.
변해명 문학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시고 소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름만으로는 남자인줄 알았어요. 역시 문학가의 수필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싶게 감상했습니다. 전 이 수필을 소리내어 두번이상 읽었어요. 내용이 너무 깊이가 있고 바다를 보는 사려깊은 통찰력과 묘사함에 놀랐어요. 앞으로 자연을 보는 안목이 달라질것 같아요. 마음을 비운 넓은 가슴과 흔들리는 것을 표용하고 따뜻함으로 머무르게 하는 몸짓만 있어보이는 남해 바다와 자신은 도시의 바다에서 서성거리며 살았다는 표현이 참 좋았고요. 바다를 일출의 빛과 일몰의 빛이 하나의 모성의 품으로 표현. 섬인 채 섬으로 서있는 고독한 나는 섬처럼 살아온 아픔을 발견한 글 속에서 공감과 경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족한 나를 발견하며 많은 도전과 배움의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수필을 감상하도록 추천해주신 수필가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월례회를 통해 서로 만나지는 못하지만 작품을 통해 이렇게라도 소통하며 나누게 해주심에 깊히 감사를 드립니다.
섬인 채 섬으로 서서 / 변해명 수필가 - 제목에서 벌써 마음을 확 끌어당기고 있어요.
이 글에서 문장 하나, 하나가 버릴 것이 없이 물 흐르듯이 연결되는 글의 힘, 그 힘에 탄력이 붙어 있어요.
수필에서 필요한 상상력, 묘사, 비유, 등... 명수필가의 답안지를 보는 듯합니다.
제 마음에 들어온 문장은 몇 있지만,이 부분이 좋아요.
'섬인 채 섬으로 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일몰이 오기 전 한 척의 작은 배를 내 바다 기슭에 대어보려 할 것이다.'
어둠 속으로 지워지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바다가, 섬이, 남해의 물결이
결국 작가의 바다의 파도의 물결을 잠재워
배 한척을 바다의 기슭에 대어본다'는
결론부분을 몇번 읽습니다.
작가의 파도는 무슨 이야기를 담고
출렁였을까요?
배에는 무엇이 담겨 있었을까요?
혼자 상상을 해 봅니다.
-작가는 파도가 없는 잔잔한 남해바다를 보며 잠시 도시를 잊는다. 그간의 흔들림, 질주, 고뇌를 버리고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다. 어둠속에서 드러나는 섬들의 고독을 보며 자신의 삶도 그와 같았음을 깨닫는다. 이제는 다시 돌아가서도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힘들었던 삶을 되돌아 보며 그 많은 추억의 편련들로 해서 위로 받을 것이다.-
바다를 보며 느끼는 감정을 이런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작가의 깊은 사유가 놀랍기만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도시의 바다에서 서성거렸다.>
이 문장속에서 제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변해명 수필가님의 작품을 대할 때면
항상 제 사고의 폭이 좁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표현력의 부족도 절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