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아몬드를 훔친 남자 / 홍 복 연
날씨는 올해 들어서 가장 추울 것이라고 한다. 보온병에다 뜨거운 보리차를 가득 채우고 큼지막한 타월까지 배낭에다 넣어 서둘러 집을 나섰다. 바람도 많이 불고 쌀쌀한 날씨이지만 운동장에 들어서니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관중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전광판에서는 선수들의 소개가 계속되고 대낮같이 밝은 조명은 어둠 속에서 더욱 반짝이는 빛을 뿌린다.
일상에서 답답함이나 어떤 변화를 원할 때 나는 망설임 없이 혼자 집을 나선다. 야구장이 집 가까이 있기에 쉽게 행동에 옮길 수 있기도 하다. 어느 운동경기보다 야구를 좋아하는 이유는 선수들이 휘두르는 방망이의 매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특히 대낮보다 더 밝게 느껴지는 불빛을 바라보며 응원할 수 있는 야간 경기때의 매력은 그 자리에서 분위기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상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야구에서의 꽃은 아무래도 홈런이 아닐까. 딱 소리의 경쾌함과 더불어 포물선을 그리며 멀리 날아가는 야구공을 바라보는 관중들의 눈빛 또한 제각각이다. 제발 홈런이었으면 하고 간절히 원하는 팀과 홈런이 아니길 바라는 팀, 그 순간만은 선수들과 관중 모두에게 숨 막히는 시간이다. 홈런이었을 때 응원단의 함성과 동료선수들끼리 서로 얼싸안으며 기뻐하는 모습에선 진한 인간애가 느껴지기도 한다.
야구에서 가장 신사적이지 못한 것이 도루라고 누구인가 말을 했다. 그러나 어찌 야구에서 도루를 빠뜨릴 수 있겠는가. 주자는 루에서 매서운 눈빛으로 타자의 모습을 주시하다가 투구와 동시에 새처럼 가볍게 몸을 날린다. 온몸은 흙으로 뒤범벅이 되었지만 관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당당하게 홈을 밟는 순간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그것은 공인된 다이아몬드 루를 훔쳐도 좋다는 남자들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벅찬 희열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내가 좋아했던 94년 도루왕 이종범 선수는 무려 84번이나 루를 훔쳤지만 아직도 그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오늘따라 그라운드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음이 못내 아쉽다.
밤바람이 몹시 차갑다. 추위를 무릅쓰고 응원에 열중하는 치어걸들의 모습에서 젊음이 느껴진다. 관중들의 함성은 밤하늘에서 메아리가 되고 파도타기의 물결이 사방에서 밀려온다. 그러나 나는 쉽게 분위기에 동화되지 못한다. 사방을 돌아보아도 내 나이 또래의 관중은 찾기가 어렵다. 불혹을 넘긴 나이라는 것은 이곳저곳 어디에서도 어중간하고 어색하기만 하다.
나는 1회에서 9회말까지를 관람하며 참으로 인간적인 모습을 느끼곤 한다. 투수는 투구를 하기 직전에 순간 정지 동작이란 것을 취하게 되는데 이 순간만은 야구장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페어플레이를 약속하는 양 팀 선수들의 무언의 약속이지 않을까.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된 모든 관중들과, 상대방 선수인 타자에게는 이제 공을 던지겠다는 신호를 보내는 게 아니겠는가. 루에 나가 대기하고 있는 주자에게도 도루에 자신이 있으며 뛰어도 좋다는 기회를 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아마 모든 사람들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이리라.
야구경기장에서 나는 삶의 소리를 듣는다. 아웃 당하는 주자의 모습에서는 겸손과 승부 세계의 비정함 같은 것을 느끼기도 한다. 머무름과 떠남을 분명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야구만이 갖고 있는 매력이 아닐까. 타자라면 누구나 홈런을 꿈꾸지만 그것이 파울이나 안타라고 해서 쉽게 포기 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인내를 갖고 묵묵히 기다리며 더 큰 홈런을 때리기 위해 연습에 몰두 할 뿐이다. 나 자신을 이기는 일이 가장 큰 경기가 아닐까. 또한 열심히 살아야 할 우리의 인생이 야구에서처럼 홈런 한방으로 역전의 기회가 되어버린다면 세상은 정당한 방법으로 보다는 기회만을 엿보는 사람들이 더 많으리라.
사람은 바위에 넘어지지 않고 작은 돌멩이에 넘어 진다는 말이 있다.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하며 더 아름다운 삶을 엮어 가는 것이 야구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전광판에서는 야구의 종료를 알리고 관중들이 떠나간 자리에 늦은 가을 바람소리만 들린다. ♣ essay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