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강바람은 소리도 고웁다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중략)…
돌아오는 채소밭 가에서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바람이 너를 마시기 전에
헬레니즘 시대에 플로티노스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가 정말 위대한 철학가였는지 그저 주술가였는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기록에 의하면 육체보다 영혼을 중시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영적인 측면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플로티노스는 우주 자체도 ‘생명이 있는 우주(Anima Mundi)’, 즉 세계영혼이라고 불렀다. 우주라는 거대한 영혼이 있고 그 안에 생명체가 지닌 영혼들이 존재한다는 설명이다. 정리하자면 이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이 전부라고 믿었던, 극단적인 사례가 되겠다. 과거의 극단을 오늘에 떠올리는 이유는 플로티노스의 사례와 우리가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는 극단에 살고 있다. 보이는 것을 믿기에도 힘에 부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신뢰하기 어렵다.
그 어려움은 봄이 되면 난처해진다.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봄날인데 우리가 보이는 것만 믿는다는 사실은 좀 죄스럽다. 저 바람을, 바람이 몰고 오는 따뜻함을, 따뜻함에 동반되는 안온함을 품지 못하는 것은 더 죄스럽다. 그래서 김수영의 시를 가져왔다. 양계장에서 닭을 치고, 채소밭에 거름을 주던 시인. 손에 굳은살이 박인 시인이 봄날을 맞는 방식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채소밭에 거름이나 뿌리면서 기계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시인은 보이지 않게 마음으로 채소를 키우고 자신을 키웠다.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이것은 보이지 않지만 마법 같은 주문이다. 그러므로 올봄에는 우리의 연약한 마음 뿌리도 기운을 받으라, 더 기운을 받으라.
나민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