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팝꽃 그늘에서 / 정희승
공원의 이팝나무 아래, 평 벤치에 걸터앉아 장기를 두는 두 사람 주위로, 나이가 지긋한 구경꾼들이 둘러 서 있다. 판에 몰입해 있는 이들의 다양한 표정과 옷차림, 태도 등으로 판단컨대, 비록 한 자리에 모였으나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사람들 같다.
공원을 두어 바퀴 돌다가 호기심이 동하여 나도 그 무리 속에 끼어본다.
중반전에 접어든 반상에는 한漢과 초楚 간에 한창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면밀히 살펴보니 아무래도 초가 약간 유리할 듯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몇 수 진행되지 않아 전세가 금세 역전된다. 수세에 몰린 한이 바깥에 있는 포를 궁으로 불러들이며 공격과 수비를 겸한 수를 놓자 상황이 일변한다. 지켜보는 사람들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일견 평범해 보이나 음미할수록 의심심장한 수이다. 갑자기 열기가 달아오른다.
“야, 뭐래? 기왕 이렇게 된 것, 차로 장이나 부르고 봐야지!” 평생 큰소리 한번 못치고 살았을 성싶은, 손이 거칠고 조금은 허름한 행색의 엉거주춤이 목소리를 높여 호기롭게 외친다. 그러자 야윈 몸에 얼굴이 약간 뒤틀린 외어앉음이 담배를 꼬나물고서 “이 판국에 장은 무슨. 차를 달라고 하면서 마를 앞으로 보내야지” 한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반짝이는 구두와 쉰 목소리로 판단컨대, 역마살로 한 시절 떠돌지 않았을까 싶다. 내 옆에 서 있는 느슨한 팔짱도 입이 근질근질한지 기어코 참견하고 만다. “둘 게 마땅치 않으면 가운데 졸을 앞으로 밀어. 발은 느려도 나중에는 그게 힘을 발휘한다니까.” 점잖은 말투로 미뤄보건대 공직에 몸담았던 분 같다. 구청 로고가 박힌 모자를 쓴, 목이 긴 넘겨봄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포에는 포로 맞받는 게 상책이야. 포를 궁 앞에 붙이라고. 이 장면에서는 딱 그 한 수뿐이야!” 포의 위력을 아는 걸 보니, 삶에 예고도 없이 떨어지는 불운에 시련깨나 겪었나 보다. 외모에서 왠지 삶의 신산함이 묻어난다. 하지만 정작 전투에 임하는 초는 이런 사면초가에도 불구하고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다. 평생 집을 돌보지 않고 맘 내키는 대로 살아서였을까? 궁을 어떻게 안전하게 방비할지 장고에 장고를 거듭한다. 이상하게도 내 눈에는, 장기를 두는 이나 훈수하는 이 모두, 판에 자신의 삶을 복기하고 있는 듯 보인다.
초의 다음 수를 놓고 저마다의 삶에서 우러나온 경험을 앞세워 의견이 분분한데, 돌연 한 줄기 바람이 이팝나무를 훑고 지나간다. 반상에 드리워진 연두 그늘이 불길하게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하연 꽃들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린다. 바람의 사주를 받은, 심통 사나운 이팝나무들의 소갈머리 없는 풍기 문란! 때 아닌 소동에 반상이 갑자기 혼란스럽고 어수선해진다.
청청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이 무슨 병고란 말인가? 예기치 않은 사태에 모두 할 말을 잊는다. 일순 열기가 차갑게 식어버린다.
정신을 가다듬고 살펴보니, 경지정리가 잘 된 들과, 왕이 사는 궁성, 그리고 기물 위에 어지럽게 떨어진 이팝꽃이 하얗게 빛난다. 구경꾼들 사이에 깊은 정적이 흐른다. 이상하게도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말이 없다. 참다못한 외의앉음이 “허어, 꽃이 꼭 잘 여문 쌀 톨 같네!” 해도 아무도 대꾸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반상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축도 같기도 하다. 그래, 젊은 날 배고픔을 참으며 두 주먹 불끈 쥐고서 한 줌의 쌀을 얻기 위해 얼마나 분투했던가. 모두는 판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지난 세월을 읽는 것일까?
장기를 두는 사람의 옷과 머리에도 밥알 같은 꽃잎이 묻어 있다. 궁을 만지작거리던 초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반상에 떨어진 꽃잎을 후후 불어 날리기 시작한다. 보기와는 달리 가벼운 것이라 쉽게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게 대충 끝나자 옷에 묻은 것들도 툭툭 떨어낸다. 그러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본다.
구경꾼들도 그 눈길을 따라간다.
이팝나무에는 꽃이 참말로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고슬고슬한 쌀밥을 지어 수많은 빛의 사발에 담아 가지마다 다문다문 올려놓은 듯. 고봉으로 소담하게 피아난 무수한 꽃송이들이 오월의 햇살에 분부시게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