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문학가
이하윤(異河潤)의 수필 <메모狂>
최초의 대학교수 수필집 《書齋餘滴》(株式會社 耕文社. 檀紀4291) -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 수필단체인 한국수필가협회가 창립된 것은 1971년 2월 12일이다. 그리고 그 기관지인 《隨筆文藝》가 그 해 4월에 창간되었다. 또한 본격 수필 전문잡지인 월간 《隨筆文學》이 1972년 3월 창간되었다. 이때가 본격 한국 수필문단의 형성기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 현대 수필문학사에 큰 영향력을 끼친 수필집은 그 이전에도 많이 발간되었다. 다만 그런 사실에 별로 마음을 두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의 현대수필을 말하면서 수필문단 형성기 이전이랄 수 있는 때에 발간된 수필집들은 문학사적으로도 대단히 의미가 크다. 그 중 특히 나는 한 책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데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교수 수필집인 《書齋餘滴》이다.
이 《書齋餘滴》은 檀紀4291년에 출간되었으니 西紀로는 1958년이 된다. 당시엔 수필가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큼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없는 때였다. 그런 때에 ‘대학교수 수필집’이란 이름으로 교수들만의 수필집이 출간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 대학교수 수필집이 나온 전후를 중심으로 하여 한국수필가협회 창립 이전까지에 나온 수필집들도 많았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현대수필은 보이지 않게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해 온 이런 많은 분들을 밑거름으로 수필나무를 키워왔다고 할 수 있다. 《書齋餘滴》엔 당시 활발하게 수필을 쓰던 열일곱 교수의 작품 58편이 실려 있다. 그것이 1958년이라는 지금부터 60년 전 일이고, 거기에 실렸던 수필들은 오늘까지도 교과서에 실려 있는 작품이 많으며 대부분 그분들의 대표작이다. 그만큼 자신을 대표할 수 있을만한 자존심의 작품들을 써서 책을 묶었음이다.
책의 면면을 살펴보면 표지 장정은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 화백이, 표지 제자는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 선생이 쓰셔서 한껏 책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총 17명의 대학교수들이 써낸 58편의 수필집엔 적게는 1편에서 많게는 6편까지 자유롭게 참여했던 것 같다.
피천득. 양주동. 주요섭. 이병주 교수의 작품이 6편씩 실렸고, 박종화. 김성진. 유진오 교수의 작품이 5편씩, 손우성. 이하윤. 이양하 교수의 수필이 4편씩 실렸으며, 이희승 3편, 조용만. 이헌구. 오화섭. 권명수 각 2편씩과 박종홍. 장익봉 교수가 각 1편씩 참여하였다. 피천득 교수의 작품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들이 오늘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내용도 다양하다.
당시 수필을 썼던 대학교수들은 문학적 심도가 깊은 분들이었다. 정형화된 수필의 틀이 없던 때였으나 이심전심 서로 통하는 수필관이 형성되어 있었고 소설가나 시인들도 수필에 큰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뿐 아니라 수필을 통해 자신의 문학세계와 학문세계를 말하기도 했다. 그런 그들에게 《書齋餘滴》은 참으로 귀한 기회였던 것 같다. 제목처럼 서재에 남긴 작은 물방울 또는 흔적일 수도 있겠으나 자신들이 가장 하고 싶은 말, 생각, 느낌, 바람들을 수필이란 수단으로 말한 것,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흔적을 남기고자 했을 수 있다.
처음에 이 책을 발견하고 뛰는 가슴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전율 그 자체였다. 아주 우연히 내가 만나고자 하던 분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곳에 내가 가게 된 것처럼 한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은 황홀감 속에서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눈으로 짚어갔다. 그리고 작품의 제목들을 보며 한 자리에 모여 있는 신기함에 기쁨을 억누르지 못했다. 누런 책장에서 풍기는 묘한 친근감의 냄새 그리고 어색하긴 해도 낯설지는 않은 세로글씨, 조심하지 않으면 마른 낙엽처럼 부서져버릴 것만 같은 남루는 반백년 세월이 얼마나 오래고 긴 세월이었나를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요즘 같으면 동인지란 별로 귀한 대접을 못 받지만 옛 분들의 이 공동 작품집은 더없이 반갑고 소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더욱이 한 사람보다 여럿을 함께 만나고 한 사람의 작품보다 여러 작가의 작품을 동시에 만나는 즐거움이요 기쁨이다. 큰 기쁨과 감격을 안겨다 준 이 수필집은 그래서 나에게뿐 아니라 우리 수필 문단에도 더없이 소중하다 할 것이다.
열일곱 분의 58편 수필들을 조심스럽게 읽어가며 그 분들의 시대에 나도 함께 들어가 보는 맛과 멋도 즐겨본다. 《書齋餘滴》 표지를 들여다보며 홀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나의 이 기분을 누가 얼마나 공감할까.
이하윤(異河潤)의 수필 <메모狂>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書齋餘滴》에는 <메모狂> <내 故鄕><故鄕回想><失鄕私民> 등 네 편이 실려 있는데 나는 이 <메모狂>을 좋아한다. 《메모광》은 시대를 초월하여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이하윤(異河潤)은 1906년 강원도 이천 출신이다. 1918년 이천공립보통학교와 1923년 제1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1926년 호세이대학 법정대학 예과를 거쳐 1929년 법문학부 문학과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귀국하여 경성여자미술학교(1929-1930), 동구여자상업학교(1942-1945)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중외일보(1930 –1932), 동아일보(1937-1940)에서 기자생활도 했다. 그는 좌익의 프로문학에 대항하여 중앙문화협회를 창설 상무위원도 역임했다.
혜화전문학교(1945), 동국대학교·성균관대학교(1947-1950) 교수를 거쳐 1949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1973년 정년 퇴직후 덕성여자대학교 교수 겸 교양학부장으로 갔으나 1974년 3월 12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 집에서 숨을 거뒀다. 그는 1926년 시대일보에 시 <잃어버린 무덤>을 발표 후 <해외문학> 동인 및 1930년엔 <시문학> 동인, 1931년 <극예술> 동인, 1932년 <문학>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39년에 첫 시집 <물레방아>를 발간했다. 1959년 한국비교문학회를 창립하여 회장으로 있으면서 비교문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 했고, 주로 외국시의 번역 소개를 하며 역시집 <실향의 화원>(1933), <불란서시선>(1954)과 <현대서정시선>(1939), <현대국문학정수> (1946) <현대한국시집>(1955) 등 편저를 냈다.
그는 민주일보, 서울신문의 논설위원과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부위원장,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 문인협회 이사, 방송용어심의위원장 등 공직도 역임했다. 사후인 1982년 이하윤 선집 2권이 출간 되었다.
<메모 광(狂)>을 읽다보면 단순히 그가 메모에 미쳐있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철저한 메모적 정리의 삶인 것을 보게 된다. 메모하는 것처럼 잘 챙기는 성격이라 평소에도 소유물을 어디서 잃어버린 적이 없다는 그, 그런 그가 친구집에 갔다 메모봉투를 잃어버리고 온다. 그는 ‘기차로 두 정거장이나 가서도 십 분 이상을 걸어야 하는 친구 집을 그 길로 다시 되짚어 찾아’가서 ‘변소로 가는 마루에서 내 귀중한 메모 봉투를 발견했을 때 즐거움’을 맛보며 그걸 가지고 ‘단걸음에 숙소로 돌아’와 ‘평소에 드문 편안한 잠자리’에 든다.
이 글이 《書齋餘滴》에 실린 것이 1958년이니 서울대학교 교수로 있을 때 썼다는 것인데 아마 50세쯤이었을 것 같다. 그는 ‘내 메모는 나를 위주로 한 보잘 것 없는 인생 생활 축도(縮圖)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할 만큼 메모에 빠져있는데 그랬기에 그가 여러 문학 활동 및 공직을 잘 감당해 낼 수 있었을 것 같다. 세월이 이만큼 흘렀는데도 여전히 읽히는 수필이니 좋은 작품이 틀림없다. 새삼 반백년도 넘은 수필에 깊이 빠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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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광(狂)
이하윤
어느 때부터인지 나는 메모에 집착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와서는 잠시라도 이 메모를 버리고는 살 수 없는, 실로 한 메모광(狂)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버릇이 차차 심해 감에 따라, 나는 내 기억력까지를 의심할 만큼 뇌수 일부분을 메모지로 가득 찬 포켓으로 만든 듯한 느낌이 든다.
나는 수첩도, 일정한 메모 용지(用紙)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아무 종이이거나 ―원고지도 좋고, 공책의 여백도 가릴 바 아니다.― 닥치는 대로 메모가 되어, 안팎으로, 상하종횡(上下縱橫)으로 쓰고 지워서, 일변 닳고 해지는 동안에 정리를 당하고 마는지라, 만일 수첩을 메모지와 겸용한다면, 한 달이 못 가서 잉크투성이로 변할 것이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을 때, 흔히 내 머리에 떠오르는 즉흥적인 시문(詩文), 밝은 날에 실천하고 싶은 이상안(理想案)의 가지가지, 나는 이런 것들을 망각 세계로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내 머리맡에는 원고지와 연필이 상비되어 있어, 간단한 것이면 어둠 속에서도 능히 적어 둘 수가 있다.
가령, 수건과 비누를 들고 목욕탕을 나서다가 무슨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면, 나는 이것을 잊을까 두려워, 오직 그 생각 하나에 마음이 사로잡히게 되나, 거기서 연상(聯想) 가지가 돋치는 다른 생각 때문에, 기록할 때까지 기억해 두지 않으면 안 될 수효가 늘어, 점점 복잡하게 된다든지, 또는 큰길을 건널 때 자동차를 피하다가, 혹은 친구를 만나 인사와 이야기하는 얼마 동안, 깨끗이 그 생각을 잊어버리는 일이 있다. 생각났던 것을 생각하나,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 내지 못할 때 괴로움과 안타까움은 거의 나를 미치기 직전에까지 몰아가곤 한다. 그러므로 목욕이나 이발 시간같이, 명상 시간이 주어지면서도 연필과 종이가 허락되지 않는 때처럼, 나 같은 메모광에게 있어서 부자유한 시간은 없는 것이다.
꿈에서 현실로 넘어서는 동안, 고개 안팎에서 얻은 실로 좋고 아름다운 상(想)을, 나는 머리맡에 놓인 종이에 곧 의뢰하건만 ― 바쁜 행보 중(行步中), 혹은 약간의 취중에 기록한 메모의 글자나 그 개념(槪念)이 불충분할 때가 간혹 있다. 그런 메모를 들여다보며 그것을 모색하는 고통은 여간한 것이 아니다. 마치, 예의 있는 석상에서 상대방 불쾌를 우려하여, 기자풍(記者風) 괴벽(怪癖)을 발휘하지 못하는 고통과 비견(比肩)할 만도 하다. 그래, 그 분명하지 못한 자신의 필적을 응시숙려(凝視熟慮)해 보건만, 결국 신통한 해답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또한 적지 아니하다. 연상(聯想)의 두절(杜絶)로 인한 무의미한 자획이 한동안 내 머릿속을 산란하게 해 주었을 따름이요, 그렇다고, 별반 큰 변동이 나 자신에게 발생하는 것은 전연 아니다.
아침마다 나는 그 메모를 대략 살펴, 그 날 행사를 발췌 초록(拔萃抄綠)해 들고 집을 나서건만, 물론 실행은 그 절반도 되지 않는다. 기회 있는 대로 정리하고 정리하는 메모, 여기저기 기이한 잉크 흔적을 보여 주는 몇 장 메모일지라도 나는 그냥 봉투 속에 집어넣고 간수한다. 그것은 고액(高額) 지폐에 비길 바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한 번도 분실한 일이 없었다.
메모뿐이 아니요, 평소에 별로 소유물을 잃어버려 본 일이 없는지라, 성냥 한 갑이라도 이유 없이 어디다 놓고 온 때에는, 불쾌한 마음이 한동안 계속되는 괴벽임에도 불구하고, 일대 사건 ― 내게 있어서는 실로 중대한 사건 ― 이 발생한 일이 있다.
이미 오래 된 일이지만, 나의 학창 시절에 자취하는 친구들 초대를 받아, 저녁을 먹고 밤늦게 집에 돌아와, 책상 위에서 메모를 정리하려고 포켓을 뒤졌으나, 내 노력은 헛것이었다. 이날 밤, 잠들기 전 일과는 상궤(常軌)를 벗어나, 내 마음을 진정시킬 길이 없었다. 찾고 또 찾고, 생각다 못해 기차로 두 정거장이나 가서도 십 분 이상을 걸어야 하는 친구 집을 그 길로 다시 되짚어 찾아갔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자리를 펴고 누웠으나, 쓰레기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었다. 변소로 가는 마루에서 내 귀중한 메모 봉투를 발견했을 때 즐거움이란! 아직도 어렸을 적이라, 환호작약(歡呼雀躍)하여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자고 가라는 권유도 한 귀로 흘리고, 단걸음에 숙소로 돌아왔다. 물론, 그날 밤은 평소에 드문 편안한 잠자리를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의 메모광적인 버릇은 나의 정리 벽(整理癖)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서적(書籍)이며, 서신(書信)이며, 사진이며, 신문, 서류 등 정리 벽은 놀랄 만큼 병적이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원고를 끝내지 못하고서는, 다른 새로운 일에 착수하지를 못한다. 독서에 있어서도 또한 다분히 그런 폐단이 있는 까닭에, 책상 위에 4,5종 이상 서적을 벌여 놓는 일이 별로 없으며, 책의 페이지를 펼쳐 놓은 채 외출하는 일도 전혀 없다.
또, 수집 벽(蒐集癖)도 약간 있어, 내 원고를 발표한 신문, 잡지들은 물론 하나도 빠짐없이 스크랩하고, 소용에 닿을 만한 다른 신문, 잡지도 가위와 송곳을 요한 후, 벽장 속에 쌓아 두는 것이다.
요컨대, 내 메모는 내 물심양면(物心兩面) 전진하는 발자취며, 소멸해 가는 전 생애 설계도(設計圖)이다. 여기엔 기록되지 않는 어구(語句) 종류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광범위한 것이니, 말하자면 내 메모는 나를 위주로 한 보잘 것 없는 인생 생활 축도(縮圖)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쇠퇴해 가는 기억력을 보좌하기 위하여, 나는 뇌수 분실(分室)을 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書齋餘滴》(株式會社 耕文社. 檀紀429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