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바지와 나 / 윤재천
나는 청바지를 좋아한다.
다크 블루, 모노톤 블루, 아이스 블루…. 20여 년 동안 색의 농도에 따라, 바지의 모양에 따라 많이도 모았다.
특별한 모임에도 눈에 거슬리지만 않는다면 나는 청바지를 입는 것이 더 편하고 자신 있다.
요즘 들어 살아온 연륜이 낯설게 느껴진다. 때로 내 몸을 휘감은 나이테가 육칠십을 헤아리게 되었다는 사실 앞에서 묘한 감정에 빠져들곤 한다. 그러나 낯선 숫자가 만들어내는 감상에 휘말려 실제 나이보다 늙게 살고 싶진 않다.
나는 젊음의 한 끝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산에 오르고, 심부름하는 아이가 없는 썰렁한 방이지만 출퇴근 시간을 정해 놓고 방을 지키는 것은 스스로를 위해 마련한 규칙 중의 하나다.
청바지를 즐겨 입는 것도 그런 의도의 일환이다. 청바지를 내 고유의 옷으로 입기 시작한 지도 20년이 넘는다.
강의 시간의 빠름을 절감한다.
강의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마음을 조이고, 퇴근을 한 다음엔 하루 동안 쌓인 피로를 씻기 위해 동료들과 어울려 목로주점에서 잘 못하는 술이지만, 분위기가 좋아 잔을 기울이는 사이에 나의 ‘시간 열차’는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 놓았다.
이것은 안타까운 일도 아니고 누구에게 투정부릴 일도 아니다. 젊음이 투쟁으로 얻어진 노획물이 아니듯, 지금의 나이도 잘못의 대가로 받은 형량이 아니기 때문이다.
젊음 날의 내 모습은 사회가 요구하던 규격품의 모습이다. 무수한 끈으로 포박당한 채 살아온 시간이다.
몇 십 년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강의이지만 부담스럽기는 늘 마찬가지다. 틀에 박힌 생활, 보직에 따라 주어지는 임무, 선생이라는 이유 때문에 무조건 참아야 하는 이율배반의 처신….
청바지와 캐주얼을 즐겨 입게 된 것은 지나치리만큼 형식에 매달려 규격화된 채 살아온 내 젊은 날에 대한 일종의 반란이거나, 보상심리에 기인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눈치 보는 일에서 벗어나 마음을 비우고 살고 싶다. 아무데나 주저앉아 하늘의 별을 헤아리고,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이 모여 사는 곳을 향해 힘껏 이름이라도 불러보기 위해서는 청바지가 제격이다.
넥타이를 매고 후줄근한 양복을 걸친 채 한강변을 거니는 초라한 형상보다 청바지에 남장을 받쳐 입고 시선을 멀리 던지며 사색에 젖어 있는 모습이 더 여유롭다. 청바지는 나를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탈출의 동반자요, 동조자다.
옷은 어느 면에서 보면 자신의 열등한 국면을 가리는 수단이며 방편이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살 수는 없지만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것은 소심小心함을 밖으로 드러내는 소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 외에는 일시적 가치를 지닌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언제나 벗어 던지고 나면 인연이 끊기고 마는 것이다.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는, 함께해야 하도록 운명 지워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겉치레의 노예가 되는 일은 자존심을 스스로 손상시키는 일이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현재의 처지와 나이가 아니고, 진취적 자세로 자신의 삶을 주도하는 자세다.
삶은 나이에 비례하지 않는다. 의지에 따라 젊게 살 수도 있고, 오래 살 수도 있다. 진짜 늙음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관념의 끈으로 묶어놓고 그 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 끈으로 나를 포박한 채 노예 상태로 살아야 했던 시간을 몇 년이라도 단축할 수 있었던 용기에 감사한다.
명예니 권세니 하는 것은 한낱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장식품은 말 그대로 장식품일 뿐 본체는 아니다. 본체와 분리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은 애착의 산물이다.
장식품은 진귀한 것이라 해도 체온이 없는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청바지는 값비싼 고급 상품이 아니다. 서양 노동자, 카우보이들이나 입는 작업복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나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사회적 통념의 구속을 비교적 적게 받는 청바지와 간단한 남방차림을 일상복으로 애용하고 있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옷이 주는 고통을 감내하는 일을 반복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 오늘도 나는 청바지차림으로 집을 나선다.
누구 앞에서도 어색하거나 부끄럽지 않다. 상대에게 결례를 범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심리적 부담을 덜게 하므로, 피곤한 사람에게 청량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이런 생각도 삶의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벗어던지고 나면 누구의 것인지도 알 수 없는 것에 마음을 빼앗긴다는 것이 허망한 일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황량한 벌판 끝에서 석양夕陽을 등진 채 말을 타고 언덕을 넘어오던 사나이와, 누렇게 익은 곡식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흘리는 농부처럼 노년을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어, 오늘도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남자’를 꿈꾸며 내 길을 걸어가고 있다.
젊은 노년으로 청바지처럼 질긴― 구김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