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를 생각한다 / 신재기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아침을 몰고 오는 그분에게 내가 차지하고 있는 묵은 의지를 기꺼이 물려주겠다는 내용의 시를 기억한다. 조병화의 <의자>라는 시편이다. 1970년대 초반 고등학교 3학년 국어교과서 권두사에서 이 작품을 읽었다. 연마다 반복되는 ‘묵은 의자를 물려주겠다’는 시구의 리듬감은 시 읽는 재미를 더해 주었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 ‘세대교체’, ‘미래의 새로운 희망’ 등으로 의미가 확산한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시적 감흥을 잃고 말았다. 시를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가슴에 깊이 새기지는 못했다. 그런데 인생살이의 나이테가 늘어나면서, 이 시편의 메시지가 점점 강하게 울려왔다. 무의식 속에 오랫동안 모습을 숨겼던 그 무엇이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듯했다. ‘자리’가 무엇이기에 모두 그렇게 애써 지키려고 하는가.
아이들이 양지바른 학교 건물 벽에 어깨를 맞대고 횡대로 줄지어 선다. 겨울철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이 교실에서 몰려나와 콜타르를 칠한 건물 벽에 붙어 서서 잠시나마 따뜻한 햇볕을 쬔다. 자리가 넉넉지 못하다 보니 서로 밀치며 자리를 지키려는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조금만 불편을 감수하면 모두 자신의 자리를 확보할 수 있는데 언제나 대열에 끼지 못하고 밀려나는 아이가 있다. 몇몇 힘센 녀석은 충분한 자리를 확보했는데도 옆 사람을 밀쳐내며,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하려고 욕심을 부린다. 아이들의 해바라기에도 자리를 두고 온갖 형태의 일이 벌어진다. 아이들의 세계도 어른과 다를 바 없나 보다. 수평의 공평함보다는 수직의 지배와 피지배는 어디에서든 발견된다. 인간적 배려보다는 힘의 일방적인 논리가 강하게 작동한다. ‘자리’를 두고.
시상식, 이취임식, 출판기념회 등의 모임에 더러 참석한다. 참석할 때마다 못마땅했던 점이 ‘내빈소개’다. 내빈소개가 빠진 행사는 없는 것 같다. 그 일이 그리 중요한가? 귀한 손님을 소개하는 것은 예의일 뿐 아니라, 유쾌한 일일 수도 있다. 문제는 본말의 전도다. 화합의 원래 목적보다 내빈소개에 온갖 신경을 다 쓴다. 주취 측은 혹시 소개할 사람을 빠뜨리지는 않았는지, 그 순서가 바뀌지 않았는지 언제나 노심초사하는 모습이다. 축전이나 화환을 보내온 사람까지 거명한다. 더 놀라운 일은 내빈이 정치판에 한자리하는 사람이거나 고위 공직자일수록 사회자는 더 큰 박수를 요청한다는 점이다. 세상에 ‘장長’이라는 직함이 그렇게 많다는 데 새삼 놀란다. 행사장 앞자리에 앉은 내빈과 뒷자리에서 그들에게 건성으로 박수를 보내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결국 ‘자리’의 차이가 아니던가.
동네 시장이다. 노점 상인이 곳곳에 멍석 반 닢도 안 되는 좁은 자리에 전을 펴고 온갖 물건을 팔고 있다. 과일을 파는 중년 남자, 채소 몇 무더기를 펼쳐놓고 온종일 앉아 있는 할머니, 고구마나 밤을 굽느라고 얼굴이 상기된 아주머니, 포장마차 안에서 어묵과 떡볶이를 파는 젊은 부부를 만난다. 이들은 지금 터 잡은 작은 그 자리가 아주 고마울 것이다. 노점이지만 장사할 자리를 가진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그 자리 덕분에 자신뿐만 아니라 딸린 식구가 모두 먹고살지 않는가. 시장바닥의 좁은 자리일망정 어찌 소중하지 않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살아간다. 큰 욕심내지 않으면 좁은 자리에서도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 고대광실에서 산다고 해도 자신의 한 몸 눕히는데 필요한 자리는 한 평이면 넉넉하다. ‘자리’를 오랫동안 독점하려는 욕망이 우리의 아름답고 순수한 영혼을 앗아간다.
사람은 사회 활동을 하면서 맡은 직위나 지위로서 자리를 가진다. 대체로 직위라는 것은 수직적인 조직을 전제하는 만큼 높낮이가 있기 마련이다. 명예, 권력, 부를 담보하는 높은 자리는 누구나 선망하고 욕심을 낸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은 개인적으로 성공적인 삶의 징표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열심히 노력해서 정당하게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도 있는 반면에 탐욕에 눈이 멀어 공평한 경쟁보다 편법과 정치적인 술수를 앞세우는 경우도 자주 있다. 정치의 계절이 왔다. ‘한자리’를 차지하려고 많은 사람이 열을 올릴 것이다. 국민과 시민을 위해 그 자리가 필요하다고 외칠 것이다. 그 외침의 공허함이 드러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지 모른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언젠가 내려와야 한다. 지금 차지하고 있는 의자는 영원히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물려주거나 버려야 한다. 내 몸을 지탱하고 자신의 존재감과 품격을 지킬 최소한의 자리만 있다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나는 지금 이 모든 이야기를 나 자신에게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