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강 / 설성제
꽁꽁 언 강 위에 그림자 하나 없다. 겨울 강이 냉기만 품는데도 강으로 나가는 것은 답답한 내 속을 풀어보고 싶어서다. 강이든 사람이든 자주 만난다고 그 속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수십 년 동안 앞마당처럼 강변을 거닐지만 강의 폭이나 깊이를 가늠할 뿐이다. 강에 들어가 보지 않고서야 어찌 속을 다 알 수 있으랴. 맵찬 날이 거듭될수록 겨울 강은 빗장을 걸 뿐이다.
겨울 강이 쓸쓸해 보인다. 곁에 있는 풀조차 물기를 거두었다. 발을 담그던 새도 떠났으니 스스로 견뎌낼 방법을 생각하느라 침묵 중인가 보다. 구름도 하늘도 산자락도 감히 강의 품에 머물 엄두를 내지 못한다. 어쩌면 강은 이미 외로움을 넘어서 버린지도 모르겠다. 그 무엇도 개의치 않은 채 한 계절을 보낸다. 나는 그것을 타성에 젖은 자존심이라 말하고 싶다.
사랑할 수 없다고 단정하고서도 사랑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사시사철 보지 않는다면 견딜 수 없을 나를 저 강은 알까. 아니면 제 맘대로 치기를 부려도 내가 이곳에 올 거라 믿는단 말인가. 그를 바라보는 내 시선 따윈 무시한 채 침묵만을 보낸다.
얼음으로 덮였다고 흐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얼음 한 장 덮었을 뿐 그 품에 사는 생명은 여전하다. 발원지에서 움튼 한줄기의 힘이 계곡을 거쳐 여기까지 왔으니 그 생명을 품고 바다로 흘러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사랑하는 것은 일방적일 수 없다. 어찌 한 쪽에서만 바라보는 것이 사랑이란 말인가. 강에 대한 사랑이 지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속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다. 내가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다고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강 언저리를 서성이다 돌아온 날이면 이토록 아프거늘.
모처럼 햇살이 포근해진 날이었다. 잠시 냉기를 거두었을 강에 나갔다. 강둑에서부터 온기가 느껴졌다. 햇살에 물비늘을 반짝이느라 바람에 몸을 맡긴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이편과 저편을 왕래하는 쪽배는 여전히 묶여 있었다. 냉기를 거두었다고 생각한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다시는 강변으로 나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내일이면 또 이곳으로 올 것을.
지난 해 강이 범람했을 때 지켜보느라 발을 동동거렸다. 도시의 일부를 덮고도 제 속을 뛰어든 것들을 싸잡아 흐르던 강, 어지러운 물살로 뻔뻔스럽게 멀어져가던 그 강이 아닌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태연해진 것을 보고서야 나도 마음이 놓였다. 그렇다. 강을 본다는 것은 나를 위무하는 일이었다. 때로는 역류하는 그를 따라가다가 뒤돌아서서 가는 그의 긴 꼬리를 바라보느라 아팠던 적도 있었다. 원하지 않아도 지나가야 할 길처럼, 비껴갈 수 없는 얼음장이라면 내가 견딜 수밖에 없었다.
나 또한 겨울 강이 되어봤다. 냉풍에 물살이 쪼개어지고 그 틈으로 쉴 새 없는 찬 기운이 스며들었다. 급기야 변곡점에 이르렀을 때 온몸이 얼어버렸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그랬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가 그랬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를 때도 그랬고, 누가 뻔 한 일을 거짓으로 만들어 우겨올 떄도 그랬다. 나의 겨울은 참으로 길고 봄은 늘 아스라했다. 그때는 누가 지속적으로 다가와도 신뢰가 차지 않아 사랑의 물길을 낼 수 없었다.
겨울 강, 그에게나 나에게나 다가올 봄이 몇 번일까.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릴케의 말을 새겨본다. '한 번, 모든 것은 단 한 번 존재할 뿐 그리고 다시는 오지 않는다. 다시 시작되는 법이 없다.'
그의 빗장을 풀 수 없어 오늘도 강 언저리에 서서 봄을 기다린다. 머잖아 얼어붙은 강에 실금 하나가 그어지겠지. 그리하여 봄바람이 살그머니 스며들어 그 마음이 풀리는 날 나에게도 기다리던 소식이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