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추억 만들기 - 정호경
인간은 이 세상에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아침 안개 같은 존재입니다. 늑대나 너구리들에게 무슨 좋은 추억이 있겠어요. 추억이란 인간에게만 있는, 지난날들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아름다운 것이지요. 그렇다고 옛날 어렸을 적 돼지갈비에 밥 많이 먹은 것이 무슨 추억거리가 되겠어요. 어렸을 적 텃밭의 노란 장다리꽃이 있어서 오늘날의 아름다운 추억이 있고, 야산이나 벼논에서 들려오는 뻐꾸기와 뜸부기의 봄을 노래하는 울음소리가 있었기에 우리에게는 지난날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이 있습니다. 추억은 정서적인 면에서의 우리의 기억이요, 그리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타고난 팔자대로 운명대로 살다 갑니다. 어디 사람뿐인가요. 요새 부잣집 안방에서 함께 살고 있는 반려견伴侶犬을 좀 보세요. 한국의 어떤 토종 녀석은 한더위의 보신탕감으로 한 많은 일생을 마치는가 하면, 외국종의 어떤 녀석은 이 한더위에 마고자까지 입고, 안방의 주인 침대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낮잠을 자고 있네요. 그런데 하나님, 날씨가 너무 뜨거워 시골집 그 더운 마루 밑에서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한국의 저 불쌍한 토종 녀석들을 좀 보살펴주세요. 사람이나 개나 타고난 팔자대로 살다 간다지만, 이는 너무하지 않은가요. 사람은 급할 때 하나님께 기도를 하여 현재의 도움을 청할 줄을 알지만, 마루 밑의 저 토종 녀석들은 기도할 줄을 모르니 보기에 안쓰럽기만 합니다.
보기에는 멀쩡한데, 속은 그와는 달라 사람됨이 많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나는 좀 더 사람답게 살기 위해 밤낮없이 수필을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수필들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대체 무엇인가요. 솔직히 말해 대개의 경우 ‘인생무상’이나 ‘그리움’일 것입니다. 그러한 속에서 내 마음은 나약해지거나 타락하지 않고, 이것들을 극복하려는 정신력이 생겨 내 나름의 아름다운 또 하나의 고향을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야산의 옥수수 밭에 고추잠자리가 날고, 한여름의 무논에서 개구리들이 한밤을 지새우며 개굴개굴 울어대는, 그런 소란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내 영원한 고향 말입니다.
고맙게도 내 글에 대해 장문의 독후감을 써서 보내왔네요. 과찬의 평문을 읽으면서 나는 부끄러워 땀을 흘립니다. 글은 미사여구를 동원해 꾸미면, 오히려 유치한 글이 돼버린다는 말만 믿고, 앞뒤의 차례에 따라 꾸미지 않고 솔직하게 쓰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시는 짤막한 글에서 표현의 의미를 함축하기 위해 은유법이나 상징법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수사법이 동원되고, 또한 소설은 허구를 통해 이야기를 재미있게 꾸며나가는 문학이지만, 수필은 허구가 아닌, 자신의 체험을 통한 인간의 진실을 쉽고 재미있게 표현하는 문학이고 보니 그런 글이 될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쉽고 재미있게 썼으면서도 감동이 있는 글이 좋은 수필이라는 말을 오다가다 많이 들어온 기억이나서 그렇게 썼을 뿐입니다. 이 뜨거운 여름 더위에 입맛 나는 것 많이 드시고 언제나 몸조심하면서 좋은 글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좋은 평문評文 고맙습니다.
꽃은 이빨이 없어서 예쁘고 귀여운데, 사람은 이빨이 있어서 아무나 함부로 물어뜯으니 무섭습니다. 그런 이빨이 나이가 들어 양쪽의 잇몸에서 하나씩 빠져나가버리면, 물귀신처럼 보여 웃으면 더 무섭습니다. 아침에 세수할 때 이빨 손질을 잘해서, 소주 한 잔에 삼겹살을 씹을 때 자칫 부주의로 빠져 밥과 함께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리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무더위에 겹쳐서 태풍까지 몰려온다니 걱정입니다. 내가 남쪽 바닷가 아파트에서 살 때는 태풍이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오는 길목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아파트가 멀미를 하는지 좌우로 흔듭니다. 그래서 나는 너무 무서워 시내 약방에 가서 그 비싼 청심환을 한 통 사다놓고 먹어봤지만, 그때뿐으로 결국에는 내가 심장병에 걸려 수술까지 받고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병원에 다니면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무서운 태풍 속에서 20년을 참고 견디며 살다가 2년 전에 이사 온 이곳은 바다도 없고, 차도나 주택지에도 숲이 우거져 있어 지금은 아무 걱정 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 비싼 청심환을 사야 할 걱정도 없고, 반찬 없는 밥만으로도 이제는 마음 놓고 살 만합니다. 나는 나이가 드니 다리에 힘이 빠져 일요일 아침 바로 집 앞의 교회에도 자주 빠지지만, 남을 욕하지 않고, 진실하고 착하게 살자는 수필을 매일처럼 써와서 그런지 이제는 그 시원찮은 다리로 길을 가다 어린애처럼 앞으로 엎어지지도 않고 얌전히 걷게 된 것을 보면, 하나님이 나를 많이 도와주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사람 사는 일이 참 우습고 얄궂네요.
내가 옛날 시골에서 산책하던 좁은 길에는 말라붙은 황소 똥이 있었고, 이제 막 싸놓은, 예쁜 강아지 똥도 있었습니다. 가다가는 뱀이 내 앞을 S자의 빠른 속도로 꼬불꼬불 내 앞을 가로질러 가기도 했고, 붕어를 낚던 시골 저수지 옆 푸섶길에는 늙은 개구리가 엎드려 낮잠을 자고 있는, 그런 길이기도 했습니다. 계절 따라 낯익은 풍경이 매년 말없이 바뀌는, 그런 시골길이었습니다.
동심童心은 신심神心으로 통합니다. 시골집 툇마루에 앉아 있는 그 어린이는 어디 하나 꾸민 데 없이 순수하고 진실하네요. 앞으로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을 나와 수필을 쓰려고 마음먹고 있는지요. 어디 하나 때 묻지 않고, 맑고 깨끗합니다. 수필은 진실한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감동이 있는 글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수필의 타고난 체질이요,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