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 정희승
올 겨울은 유난히 눈이 잦다.
생수통 하나를 배낭에 짊어지고 조용히 밖으로 나온다. 주말에는 일찍 집을 나서야 약수터에 사람이 붐비지 않는다. 노모는 새벽 기도를 다녀와 곤히 주무시는지 기척이 없다.
하룻밤 사이에 마을이 은세계로 변해버렸다. 단독주택 지붕 위에도, 차 위에도, 화단과 나무 위에도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부지런한 수위 아저씨가 벌써 사람이 다닐 수 있게끔 눈을 쓸어 길을 터놓았다. 새벽에 노모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발자국을 남겼으련만 이미 지워지고 없다.
눈을 밟으며 아침 일찍 물을 뜨러 가니 마음이 차분해지고 숙연해진다. 내딛는 발걸음도 조심스러워지고, 산자락에 있는 약수터로 물을 길러 가는 것은 꼭 건강 때문만은 아니다. 비록 성공과 영광보다는 실패와 좌절을 더 많이 안겨준 세상이지만, 그래도 맑게 살고 싶은 바람을 마음 한쪽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수터는 집에서 약 2km쯤 떨어진, 유원지 안쪽 깊숙한 곳에 있다. 아파트 뒤쪽으로 난 2차선 도로를 따라 산자락을 오르다보면 곧 인가가 끊기고 고개가 나타난다. 그 너머에 유원지가 있다.
목도리를 둘렀음에도 하얀 입김이 풀풀 새어나온다. 고운 눈 위에 첫 발자국을 남기며 걷다보니, 아무래도 내딛는 발걸음에 주의하게 된다. 똑바로 걷고 싶은데도 그게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는다. 뒤돌아보면 발자국들이 배뚤배뚤 산만하게 나 있다. 그래도 눈을 밟을 때마다 나는 뽀드득 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이제 유원지를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 온천이 개발되면서 호텔이 들어서지 않았다면, 진즉 발길이 끊겼을 것이다. 온천도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다. 평소에는 한적하고 퍽 쓸쓸한 곳이나, 눈이 내려서인지 오늘은 아늑하게 느껴진다.
유원지를 끼고 조금 올라가면 아담한 절이 나온다. 진입로 가로수에는 동안거 기간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지금이 1월 중순이나 스님들은 한창 수행에 정진하고 있을 것이다. 눈 덮인 절이 한결 고즈넉하게 느껴진다.
약수터는 절 바로 지척에 있다. 절 앞에서 우회하여 산등성이 타고 조금 올라가면 약수터에 이른다. 전인미답의 눈길이 말해주듯 역시 아무도 없다. 내가 첫 번째 방문객이다.
수로도 꽁꽁 얼어 있고 샘을 덮은 흙 위에도 두꺼운 눈이 쌓여 있다. 이곳 약수터는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수도꼭지 하나만 내 놓고 석축을 쌓아 샘을 완전히 봉해버렸다. 그래서 물이 솟아오르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안으로 공기 출입이 자유롭지 못해 물이 늘 쿨렁거리며 쏟아져 나온다. 물줄기가 가늘어졌다 굵어지기를 반복하며 질금거린다는 말이다. 석축 돌 틈에 뿌리를 내린, 쓰러진 산국 위에도 눈이 쌓여 있다. 꽃들은 이미 빛깔이 하얗게 바랬고 내뿜은 향도 전혀 없다.
역시 물맛이 좋다. 결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어디 그뿐인가. 주위에 늘어선 여남은 그루의 소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도 상쾌하다. 수도꼭지에 물통을 물려 놓고, 잠시 숨을 돌리며 훤칠한 소나무를 올려다본다. 줄기가 불그스름한 금강송이 흰 눈을 이고 있는 자태가 자못 신령스러워 보인다. 솔바람이 일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 무더기의 눈이 쏟아져 내린다. 디이어 눈가루가 분분히 휘날린다.
집에 돌아오니 노모는 밥을 안쳐놓고 성미(誠米) 관리대장을 붙들고 씨름하고 계신다. 신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매달 쌀을 신께 바치는데, 노모는 연로한 회원들이 속한 조의 회계를 맡고 계신다. 돋보기를 쓰고 깨알 같은 글씨를 들여다보며 50명이 넘는 회원의 명세를 관리하는 게 쉽지 않은지, 눈과 귀가 유난히 밝았던 노모는 이제는 쩔쩔매신다. 내가 도와드리지 않을 수 없다. 대장을 들여다보니 계산이 복잡해서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회원 대부분이 편의상 쌀 대신 돈으로 바치기 때문이다. 나는 잦히는 밥물 소리를 들으며 대장을 꼼꼼히 점검한다. 정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계산이 끝나고 나서도 되풀이해서 검산하다. 개인적으로는 돈이 아닌 쌀을 올리는 몇몇 회원의 정성이 더 지극하게 느껴진다.
9시가 넘어서야 아침을 먹는다. 둘만의 단출한 식사라 노모는 둥근 소반 위에 아침을 차린다. 반찬이라야 동치미와 도라지나물, 김치 그리고 구운 김과 간장이 전부이고 거기에 된장국을 곁들였다. 지금은 동치미가 가장 깊게 익어가는 때이기도 하다. 언제나 그렇듯 노모는 밥상을 앞에 놓고 먼저 기도를 드린다.
나는 밥술로 국을 뜨려다 말고 무심코 밖을 내다본다. 잠시 머츰하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바람이 자는지 굵은 눈송이들이 고요하고 평화롭게 떨어진다.
정녕 하늘은 어느 것도 배제하는 법이 없다. 모든 것을 다 포용한다. 그리고 결코 무심하지 않다. 저렇게 눈이 내리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참 푸짐하게 내리는 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