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바람 소리 / 유경환



이맘때쯤이면 솔이 푸르러진다. 춘분이 열흘 남은 시기다. 백자에 그려진 솔처럼 독야청청이라는 한자 표현이 어울리는 색깔이다.


껍질 갈라진 검은색의 겨울나무들, 그 틈에 돋보이는 소나무. 흘깃 보는 것이 아니라 정색을 하고 보면 바라보는 눈길에 솔바람 소리가 따라온다.


기암괴석에 돋은 솔이 아니다. 발걸음에 봄기운이 감겨드는 산비탈 길에서 가까이 마주하게 되는 소나무들이다. 평범한 굴곡을 안고 있는 산등성이 비탈에 조심스레 푸른 눈을 뜨고 있는 소나무들이다.


다정해 보여 정겹기만 하다. 그 모양이 어느 하나와도 같지 않으면서 오히려 주위와 조화를 이루는 의젓한 소나무이다. 이 조화를 솔바람 소리가 돋보여 주고 있다.

야트막한 산자락 곁으로 도는 산시냇물이 개울로 이어지기까지 몇 굽이도는 양지쪽마다 한두 채의 고가(古家)가 고개를 숙이고 있고, 이 초가들이 솔바람 소리를 나보다 더 오래 듣고 있다.


한겨울을 이기고 봄을 맞게 된 환희. 어찌 보면 이런 표정이다. 표정은 살아서 감정과잉이 솔가지 밑으로 출렁이도록 미풍을 끌어온다. 그 꿈결 같은 솔바람 소리.


불레즈가 지휘하는 말러의 교향곡 5번을 연상한다. 아니 그 연주곡이다. 듣고 있노라면 새 푸른 솔의 정취가 고향의 아득한 밑그림을 떠올려준다. 소박한 사람들이 마음 편하게 살기에는 산천 역시 그 형세가 소박해야 한다. 그럴 수밖에 없음을 솔바람 소리가 연주곡의 메시지로 일러주고 있잖은가.


사랑하고 태어나 사라지는 과정이 평범한 그대로 아름다우려면 비바람에 찢기고 갈리는 아픔이 있어야 한다. 이 경우 아픔이란 포근히 다가오는 위안의 안내자이다. 소나무들이 이를 겪어내는데 하물며 목숨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이 이를 피하랴. 아픔과 아름다움은 따로가 아니고 하나인 것을 솔잎 끝에서 나오는 바람 소리로 본다.


이제 머잖아 신록이 퍼지게 되면, 겨우내 홀로 푸르렀던 솔빛은 오히려 묻혀버리게 된다. 세상의 모든 일이 이와 다르지 아니한 것이 없다. 그래서 이맘때쯤이면 솔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은 심사가 간절해지는 것이다.


올 여름엔 선거가 끝나기까지 떠들어댈 ‘저 잘난 맛’을 얼마나 들어줘야 할까. 솔바람 소리를 청전(靑田)의 그림 보듯 미리 들어둔다.




 

 

유경환(1936. 11. 23 ~ 2007. 6. 29)


황해도 장연 출신인 유경환선생은 십대 때부터 소년세계 · 새벗 · 학원 같은 잡지를 통해 문명(文名)을 날렸고,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재학시절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와 ‘현대문학’ 추천을 거쳐 시단에 데뷔하여, 《산노을》, 《혼자 선 나무》 등 50여 권의 시집을 통해 평자들로부터 ‘간결한 이미지로 압축한 맑고 따스한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리고 월간 《사상계》 기자로 시작, 사상계 편집부장, 조선일보 문화부장, 소년조선일보 주간, 조선일보 논설위원 겸 사사편찬실장, 문화일보 논설위원 등 40년 동안 언론계에 몸담았다.


언론인과 문인 생활을 모두 한 까닭에 2003년 시집 《낙산사 가는 길 3》으로 제15회 지용문학상을 받았을 때 “이제야 문인으로서 이력서를 쓸 자신이 생겼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아동문학인협회 회장, 한국아동문학교육원 원장 등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