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석 달 / 유혜자
비가 자주 오던 6월의 마지막 장날이었다. 나는 비가 올까봐 조바심하던 것과는 달리 쨍한 햇볕에 신이 나서 장터로 뛰어나갔다. 방앗간 앞에 다다라서 걸음을 멈추고 벽에 기대어 저편에 책장사 아저씨가 왔는지 살펴봤다. 틀림없이 등이 구부정한 아저씨가 돌아앉아 있는 것을 확인하고 쏜살같이 뛰어갔다.
그렇게도 기다리던 아저씨가 이번엔 만화 <선동왕자> 3편을 꼭 가져 왔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아저씨는 그 책은 아직 안 나왔다면서 다른 책을 내밀었다. 노란 머리에 예쁜 원피스를 입은 소녀들과 반바지에 눈이 파란 소년들이 그려진 표지의 <꿈나라 아이들>이란 동화책이었다. 다른 만화처럼 얄팍하지 않고 내용도 좋아 보여 그 책을 사고 싶었지만 돈이 모자라서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갔다.
손님들과 얘기중인 아버지는 내가 왔다 갔다 해도 여느 때와는 달리 본 척도 안하셨다. 나는 안타까워서 손님들 앞에서 무릅쓰고 책값을 주시라고 했다. 선뜻 돈을 줄 줄 알았던 아버지는 “꿈 속 같은 얘기를 하는구나. 꿈나라 아이들이고 뭐고 난리가 나서 피난을 가야 한단다.”시며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손님들과 얘기만 하셨다.
집안에 들어오니 할머니와 어머니도 장롱을 열어 놓고 옷을 주섬주섬 싸고 계셨는데, 돌아다니는 나를 나무라실 것 같아 얼핏 뒤꼍으로 나가봤다. 수돗가에선 이웃 아주머니들이 피난 갈 장소를 서로 묻고, 곡식을 씻으며 며칠 동안의 음식을 장만해 가야 한다고 서둘렀다. 그리고 우리 집 부엌언니는 담 옆에 땅을 파고선 아끼던 예쁜 사기그릇을 묻고 있었다.
30리 밖, 먼 친척인 과수원 댁으로 피난 간다는 것만 알아낸 나는 얼른 흰 운동화를 내다가 분필가루를 칠했다. 석이네는 떡을 해 간다는데 내 딴엔 감자라도 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어른들이 시키지도 않은 감자껍질을 벗기며 소풍준비 하듯이 콧노래를 불렀다.
할머니는 우리를 안심시키려는 의도에서였는지, 아니면 실제로 그렇게 믿으셨는지 “도회지는 위험하니까 시골에 며칠만 있다 오면 된다.”고 하셨다. 나는 며칠 동안이라도 두고 떠나는 텃밭 옆 돼지우리 속의 돼지들과 닭장의 닭들이 안쓰러워서 삶은 감자와 보리쌀을 듬뿍 뿌려 주고 돌아섰다. 그날의 해맑은 초여름 바람은 무척 선선해서 기분이 상쾌했다.
과수원 아저씨 댁엔 우리 가족 이외에 타지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헛간까지 차지했으나 대부분 친절했다. 며칠 후 아버지는 혼자서 우리 집에 다니러 가셨다. 밤중에 멍석에 누워서 밤하늘을 보며 이제나 저제나 하고 아버지를 기다리는데 웬걸, 쿵하고 먼 곳에서 폭격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벌떡 일어나 보니 우리 집이 있는 K읍 쪽에서 벌건 불길이 보이고 있었다. 어머나! 전쟁도 아닌데 공연히 피난 온 것같이 평화롭던 가슴이 드디어 쿵쿵 뛰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서성거리는 우리를 앉혀 놓고 기도를 했지만 가슴이 졸아든 나는 폭격 소리에만 신경이 쓰였다. 함께 피난 온 옆 방 아주머니는 우리를 쓰다듬으며 별일 없을 거라고 안심시켰다. 그런데 좀 전까지도 상냥하던 한 젊은 새댁은 우리네가 관공서 간부 가족이기 때문에 적이 오면 위험할 거라고 입을 삐죽거렸다.
등에 닿는 멍석의 껄끄러움도, 팔뚝을 뜯는 모기떼도 아랑곳없이 밤을 지새우고 얼핏 잠든 새벽, 꿈결엔 듯 들려온 아버지의 목소리에 잠을 깼다. 이미 K읍에도 인민군이 쳐들어와서 허겁지겁 싸온 아버지의 보따리 속에선 뜻밖에도 하모니카가 굴러 나왔다.
며칠 후엔 동네 청년들이 우리를 모아다가 생소한 북한노래를 가르쳤고 이따금 저쪽 언덕에서 빼앗아 간 내 하모니카로 서툴게 부는 그 노래 멜로디가 폭격 소리와 함께 들려오곤 했다.
이따금 도회지에 다녀온 피난민들이 쉬쉬하며 인민재판이나 학살 장면, 폭격으로 죽은 험악한 시체 얘기를 할 때, 우리의 공포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이 은빛 날개로 날아가던 B29. 어쩌다가 배 과수원에서 까치가 울 때면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오늘은 반가운 일이 있으려나 보다”며 우리 집으로 가는 황토 고갯길 쪽을 올려다보곤 하셨다.
그 황톳길 왼쪽에는 목화밭이 있었다. 그때 처음 본 연분홍 목화꽃은 따발총 소리나 폭격과는 상관없이 곱고 평화롭게 피어 있었다. 꽃이 지고 보풋하게 피어나는 목화송이는 포근하게 감사 줄 것 같아 자주 갔다. 목화밭에서 집으로 가는 고갯길을 자주 바라보던 어느 날이었다.
낯선 군복의 지친 사나이가 절뚝거리며 주인아저씨 댁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 말로만 듣던 인민군이었다. 아저씨 댁은 아들이 6‧25 전에 월북한 집이라서 인민군을 반기리라 생각했다. 우린 무서워서 금방 집에 못 가고 뒤늦게야 들어갔더니 이미 인민군이 떠난 뒤여서 안심하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이른 새벽 우물가에 나가 보니 주인아주머니는 돌아앉아 붉은 물이 우러나는 커다란 북한 깃발을 북북 치대며 빨아 대고 있었다. 석 달 동안 그 댁 안방에 모셔 두고 있던 것을 그림이 망가지도록 빠는 것이 이상해서 어머니께 뛰어가서 일렀다. 어머니는 놀라는 대신 웃으며 그 헝겊은 이제 이불 속이나 만들 것이라면서 난리가 끝났으니 집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닌가.
나는 너무 신이 나서 우선 K읍으로 가는 고갯길 쪽으로 내달려 나갔을 때였다. 분명 너무 가까운 곳에서 탕! 하고 총소리가 났다. 저만치 나무 뒤에서 쓰러지는 인기척에, 집안에서 달려 나온 이들과 함께 가 봤을 때 전날 본 인민군이 가슴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아! 누가 쐈을까. 전날 저녁에 떠난 인민군이 왜 그때까지 거기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못 풀면서도 돌아가는 길이 피난 올 때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임에도 놀랐다. 폭격에 타 버렸다고 들은 우리 집은 어떤 모양일까. 높은 소방 탑의 철골이 저만치 보였을 때 내 가슴은 우선 치솟았다. 그러나 길목의 우리 학교 운동장엔 응당 있어야 할 2층짜리 교실이 온데간데없고 한 쪽에 벽만 남은 강당이 보일 뿐이었다. 사진관도, 쌀집도, 친구네 집도 안 보이는 집터에서 벽 부스러기들이 먼지만 일으키고 있었다.
겨우 소방 탑 앞이 우리 집터임을 짐작하고 들어섰을 때 유리 한 쪽도 안 남은 집터와, 좀 떨어진 텃밭 자리엔 타다 만 돼지우리와 닭장의 철망 조각이 보였다. 나는 다시 그릇이 묻혔을 담 밑 자리를 조심스럽게 파 보다가 깨어진 그릇들 사이에 용케도 남은 성한 보시기 한 개를 발견했다.
화염에 그슬리고 충격으로 깨어진 그릇들 사이에 흠 하나 없이 남은 것이 신기해서 받쳐 들고 나오다가 부딪치지도 않았는데 그만 탁 깨어지고 말아 서운했다.
어쩌면 전쟁은 직접 참여하여 목숨을 잃었거나 참변을 당한 사람뿐만 아니라, 겉보기엔 멀쩡해도 이내 깨어진 사기그릇처럼 우리 모두에게 충격과 상처를 준 것이었다.
피난길이 소풍길인 줄 알았던 ‘꿈나라 아이’는 그해 석 달 동안 총에 맞은 인민군의 끔찍한 죽음을 보았고, 그때의 기억은 6‧25가 터진 지 50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가끔씩 상처처럼 되살아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