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좋은수필 2015년 6월호, 현대수필가 100인선 엿보기] 콩나물국을 먹다가 - 최 운 

콩나물국을 먹다가        /  최  운

 

   큰아들과 저녁상을 받았다.
   콩나물국에서 더운 김이 피어오른다. 고춧가루를 듬뿍 탔다. 코를 훌쩍거리며 국물을 떠 마시고 건더기도 어적어적 씹어 삼켰다. 요 며칠 나는 감기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서울에 가면, 거기서는 어떤 음식을 먹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한식은 아예 구경도 못하리라는 전제가 생략된 질문이다. 하긴 나도 아르헨티나에서 끼니 때마다 밥과 김치를 먹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이민을 왔다. 감기에 콩나물국을 일부러 끓여 먹을 정도라면 못 미더워 할 사람도 꽤나 많을 것 같다.
   “아, 시원하다.”
   얼른 고개를 들어 아들의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아비 앞에서 본데없구나 싶기도 했지만, 그 생각은 잠깐이고 어쩌면 그렇게도 제 할아버지 어투를 꼭 뺐을까에 정신이 몽땅 몰수를 당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도 콩나물국이나 무국을 드실 때는 “아, 국물 한번 시원하다.”소리를 빼놓지 않으셨다. 뜨거운 것을 왜 시원하다고 하시는지 어려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는데, 세월이 흘러 그렇게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쯤, 아버지는 저 세상으로 가셨다. 큰아들도 이제는 아비인 나를 이해할 나이가 되었다는 말인가.
   뜨거운 국물을 먹어서인지 아들의 얼굴이 벌그무레하다. 그 위로 아버지의 창백한 얼굴이 일렁거린다.
   청솔 타는 저녁연기가 초가 마을을 뒤덮고 있었다. 나는 신작로에서 친구들과 자치기를 하다가 긴 그림자를 앞세우고 주춤주춤 걸어오시는 아버지를 보았다. 땀에 젖은 얼굴은 핏기가 없었고, 등에 매달려 있는 보따리는 무척 무거워 보였다. 집에 가서야 알았지만 그것은 콩나물 자루였다.
   내 나이 열두 살, 북쪽에서는 아직도 포성이 그치지 않던 수복 직후 어느 가을날에 생긴 일이다.
   전쟁 중임에도 인륜대사는 어쩔 수 없었던지, 아랫마을에 혼인 잔치가 들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근동 길흉사에 우리집에서는 절편을 만들거나 두부를 만들거나 콩나물을 길러서 머슴 지게에 지워 보내는 것으로 축의를 삼아왔다. 조석거리조차 귀해진 난리통에 그런 격식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었고, 머슴 김서방도 제 길 찾아 이미 떠나버리고 말았으니…. 잔칫날이 내일로 다가왔다. 아버지는 작심하고 이십 리 길 시내로 발걸음을 재촉하셨던 것이다.
   지금이니까 대충 이렇게 추리를 한다. 그때는 몰랐다. 부조거리를 장만하기까지의 경제적 고충도, 콩나물 자루를 멜 수밖에 없었던 난감한 처지도 알지 못했다. 중절모와 두루마기 차림이 아닌 아버지의 추레한 입성을 보고도 아무 느낌이 없던 철부지였다.
   어느 때부터인지 그날의 아버지 행색은 선명한 영상으로 되살아나 가슴을 아리게 했다. 철이 든다는 것은 양친을 연민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나는 그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6·25는 우리집을 몰락시켰다. 동란을 분기점으로 아버지는 햇볕 못 보는 여생을 시들시들 보내다가 쓸쓸히 생을 접으셨다.
   아버지는 무학이시다. 성냥개비로 산算을 놓으셨고, 이른바 진서 앞에서는 무척 답답해 하셨다. 신식 학교에 나오라며 관리들이 동네로 찾아오면 콩밭에 들어가 숨을 만큼 어둡던 시대. 어두운 가정에서 성장한 탓이리라. 그러나 사업 수완만은 남다르셨던 모양이다. 농사는 아예 머슴에게 맡기고, 건축 청부업과 집 장사로 대처를 휘도셨다.
   유전은 큰아들에게로 건너뛰었다. 긍정적인 사고와 새 일거리에 대한 겁 없는 추진력이 당신 손자에게 고스란히 옮겨져 있는 것이다. 물론 혈족에 쏟는 너그러운 마음씨도 조손祖孫은 서로 기울지 않는다.
   나는 징검다리 노릇만 한 셈이다. 그나마도 서울 태생에 갯가 성장 아니랄까 봐 그다지도 배리고 짠 티를 내느냐는 놀림을 받아 가면서. 하지만 오직 한 가지, 팔도강산은 물론이고 만주 구석구석까지 닿았던 아버지의 방랑벽만은 의외로 내게 도져 버렸다.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온 핑계가 골백 가지라도 이보다 더 명확한 이유는 다시 없을 테니까 말이다.
   “아버지, 더운 국물 더 드시지요.”
   내 국그릇이 바닥난 것을 본 아들은 단지 이 말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 고개가 들어지지를 않는다. 나는 아버지에게 무엇 하나 곰살갑게 권해 드린 적이 없다는 생각이 고개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이다.
   열은 오르지 않는데 얼굴은 자꾸만 달아올랐다.

 

 

 

   최운 수필가, 《에세이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가라보보의 참나무》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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