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좋은수필 2018년 1월호, 현대수필가 100인선 엿보기] 문 - 김양희 


   -   김양희


   문門을 열어보니 어머니는 잠들어 있었다. 그게 이승과의 마지막이었다. 세상과의 연緣을 문 하나 사이로 마감한 것이다. 숨지기 전 자식들이 저 문을 열어주기를 엄마는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을까. 문은 세상과의 소통이요, 자신을 열어 보이는 통로였다. 열림은 오는 것이요, 닫힘은 가는 것이다. 열린 문은 닫히게 마련이듯이 온 사람 또한 반드시 가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문은 인생이요, 작별이요, 또 다른 세상과의 만남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은 마지막이 아니요 시작이다. 더러는 입시의 문을 통해 청운을 꿈꾸기도 하고, 인과의 연을 통해 배필을 만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짝을 만나 생활의 이삭들을 빨리 거두는 이가 있는가 하면 학문이나 환경, 운명 때문에 늦게서야 가정을 꾸리는 이들도 있다. 사람은 제 복을 타고 나는지 어릴 때 부모님은 늘상 ‘무겁지 않은 복을 지녀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러나 그 분복分福이라는 것도 저마다의 그릇이 있어서 보이지 않는 복을 기다린다는 일은 오지않는 어제를 기다리는 것과도 같은 일이었다.
   ‘삐그덕-’ 하고 열리던 곳간의 문은 곡물로 채워진 온갖 생명의 보고였다. 차고 어둑시근한 공간에 들어서면 단지마다 차 있던 쌀, 보리, 찹쌀과 콩이나 겨울이면 말랑하고 달콤한 홍시가 감춰져 있기도 했다. 할머니는 허리춤에다 길쭉한 무쇠 열쇠를 매달아 손자들에게 호기 있게 간식을 나눠주곤 했는데 어머니의 손에 곳간 열쇠가 돌아온 것은 십수 년 인고의 세월이 흐른 후였다.
   무시로 드나드는 문이지만 열쇠를 잃고 나면 낯선 세상에 선 듯 아득해질 때가 있다. 침묵피정의 수도원에서 어느 날, 내 방의 문이 열리지 않아 난감했던 적이 있었다. 문고리만 쥐면 언제나 호락호락 문이 열릴 줄만 알았던 안일한 생각이 부른 실수였다. 어둡고 긴 복도의 서성임을 통해 세상이 얼마나 낯선 여관방인지 실감한 일이었다. 그러나 세상 시간의 여백을 위해 수도원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다. 그늘 없는 믿음과 그 믿음에서 오는 평온이 그리울 때면 가끔씩 침묵피정을 떠나도 좋을 것이다.
   사는 일이 절벽에 선 듯 아득해질 때 빛처럼 희망을 준 것은 ‘한쪽 문 닫히니, 다른 쪽 문 열린다.’는 이 금언이었다. 나는 이 말을 수첩에 적어 다니며 스스로 뇌에 입력시키곤 했다. 반복 훈련의 과정을 통해 세뇌된 힘과 신념은 운명을 그쪽으로 바꾸어 주었다. 열린 문은 희망이요, 닫힌 문은 절망이다. 어떤 문을 택할 것인가는 스스로가 정할 일이다. 마음의 손잡이는 안에만 달려 있어서 남은 열어줄 수 없고 자신만이 열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 안에는 네 개의 창이 있다고 한다. 내가 알고 남도 아는 창,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창, 나는 아는데 남은 모르는 창, 남은 아는데 나는 모르는 창, ‘조 하리의 창’이라는 이 네 개의 창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바라본다고 했다. 창문을 통해 내면을 보고 거울을 통해 외면을 바라본다. 독수리의 눈으로 삶을 바라본다면 세상은 폭넓게 보일 것이요, 메뚜기의 눈으로 바라보면 근시안적으로 밖에 보지 못할 것이다. 나는 곧잘 편협한 생각에 갇혀 스스로를 괴롭힐 적 마다 내 안에 있는 메뚜기의 시선을 느끼곤 한다.
   인간 심성에서 표출하는 욕구와 분노의 문은 죄와 양심의 사이를 오가는 저울이 되기도 한다. 수행자라 하여 마음에 지옥이 없을 수 없으며, 죄인이라 하여 그 마음에 천국을 꿈꾸지 말란 법도 없을 것이다.
   교도소를 방문한 적이 있다. 재소자 문예공모전을 위한 걸음이었다. 교도관이 지키고 선 커다란 철문을 기점으로 담 안과 바깥이 분리되고 있었다. 우리가 준비한 음식이나 상품은 또 다른 문을 통해 검열되는 듯했다. 죄와 벌이 가려지는 곳. 그들은 왜 그곳에 와 있는가. 태어남에 선택이 없듯이 누구도 원해서 거기 온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손가정, 생활고, 이념, 욕심, 원한, 폭력… 죄를 잉태하는 이름들은 많지만 사회의 시선은 얼음같이 차갑기만 하다.
   그들 가운데 자주 눈이 가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반듯한 이마와 단정한 머리 모양, 흰 피부 때문에 수의는 더 푸르게 보였다. 그는 단상을 지긋이 바라보고만 있을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가끔씩 성가를 따라 부르며 엷게 웃는 듯도 했다. 검은 테 안경 사이로 스치는 지성의 향기, 그 맑은 영혼 어디에도 죄의 구석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떤 단초였을까. 그를 거기 있게 한 것은…. 그 아내와 자녀들의 기다림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가족이 함께 하는 따뜻한 저녁 밥상을 그려보았다.
   성가대의 선율은 경쾌하고도 부드러웠다. 입상한 수상자의 자작시 낭송 차례가 왔다. 백발을 머리에 인 그의 목소리는 몹시 떨렸고, 원고를 쥔 앙상한 두 손은 바람결의 촛불처럼 더욱 심하게 떨고 있었다. 가슴 속 파도가 풍랑을 타고 요동친다. 쏟아놓은 마음 속 오뇌의 덩어리가 한 인간의 깊은 곳을 두드린다. 죄와 위선과 가식이 사라진 순수 인간의 진정성 앞에서 그 시간 담장 안은 더 이상 어두움의 공간이 아니었다.
   마음의 문이 열렸을 때는 순한 의지가 함께 하지만 닫힌 마음 안에는 세상과의 단절이 있을 뿐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일은 나를 내어주는 일이다. 백합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바라보는 마음에 향기가 없다면 꽃은 한낱 물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재소자 방문의 그날, 내내 나를 사로잡았던 화두는 ‘세상의 법으로는 그들은 담 안에 있고 우리는 바깥에 있지만 하느님의 법으로는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생애를 통해 드나들었던 수많은 문. 가볍고 만만해서 쉽게 밀고 나선 문도 있었으나 내 힘으로는 너무 무겁고 버거워 도무지 열리지 않았던 문도 있었다. 세상과의 벽이 너무 높아 두드리지 못한 과욕의 문 또한 있었을 것이다.
   하늘의 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끝 간 데 없이 무량해서 입구도 출구도 찾을 수 없건만 사람들은 생의 마지막에 서야 할 문이 거기라고 믿고 있다. 담담히 기다렸다가는 속절없이 열리고야 말 문 앞에 서서 하늘을 바라본다.
   마지막 문 하나 밀고 들어서면 거기서 어머님이 반겨주실까.



⁕ 김양희 1999년 ≪수필과비평≫등단.
저서: 『순례의 여정』, 『홀로 우는 바람소리』, 『사랑에 죽다』, 『마라강과 가브강』, 『현대수필가100인선집』,  『그대의 흰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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