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가 100인선 엿보기] 배웅 - 박경주 [밥상]  

배웅   -   박경주 


   언제 끝날 것인가. 고통에 절은 아버지가 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말씀이다. 싸늘한 겨울바람 속에서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배웅하고 돌아오던 날, 영원한 별리의 아픔은 가슴을 도려내는 듯했다.
   일생 병약했던 아버지가 미수米壽까지 살다 가신 것은 우리 가족에겐 뜻밖의 행운이었다. 그러나 당신에게 그 세월은 차마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다섯 해 동안 산소호흡기에 달린 반경 십 미터 정도의 줄에 끌려 다닌 삶은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운 것이었을까. 그것은 결말이 뻔한 마지막 장면이 너무 길어져 버린 소설처럼 아버지에게도 우리 삼남매에게도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었다.
   아버지의 무릎에서 놀던 어린 시절부터 집에 손님이 다녀가시면 당신은 나를 데리고 대문 앞까지 꼭 배웅을 나가셨다. 그것을 귀찮아하면 그렇게 해야 정다워지는 것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아마도 아버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을 배웅하는 작은 정성에서 찾았던 것 같다. 젊은 시절, 아버지의 마중과 배웅은 때로 나에 대한 집착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미혼 시절이었다. 나는 광주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때도 지독한 병마와 싸우고 계셨다. 그런 와중에도 당신은 늘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골목 밖까지 나를 배웅하셨다. 아버지의 기다림은 저녁 무렵, 퇴근길의 마중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퇴근 후의 시간을 마음껏 즐길 수 없었다. 이따금씩 이성과의 데이트가 있던 날은 더욱 그랬다. 그땐 데이트 후 으레 남자가 여자를 집까지 바래다주곤 했는데 항상 골목 밖까지 아버지가 나와 계시니 여간 난처한 것이 아니었다.
   정년퇴임을 하시고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오셨다. 건강은 예전보다 좋아지셨다. 친정집과 내가 살던 주택은 도보로 꼭 십오 분 정도 되는 거리였는데 아버지는 새벽 네 시에 시작되는 당신의 새벽 산책을 하루도 빠짐없이 불광천변에서 우리집 앞을 지나는 코스로 택하셨다. 새벽녘, 보행 간격에 맞추어 지팡이 끝에 달린 징이 일정한 박자로 낭랑하게 아스팔트를 때리는 소리는 산사의 목탁소리처럼 들려왔다. 새벽 네 시가 조금 넘으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아버지의 지팡이 소리에 잠에서 깨어 골목으로 향한 베란다로 나갔다. 그러면 아버지는 서둘러 다가오시며 힘차게 지팡이를 휘저으며 우리집 대문 앞을 지나가셨다.
   “아버지!”
   “오냐!”
   그것은 당신과 나와의 아침 인사요, 하루의 시작이었다. 아버지가 다녀가신 후, 나는 밥을 안치고 아이들의 도시락을 준비하고 남편의 출근 채비를 도왔다. 구태여 시간을 알리는 자명종이 필요 없었다. 아버지의 새벽산책은 일요일에도 계속되었다. 고요한 일요일 새벽, 아버지는 어김없이 나타나 아침잠을 깨우곤 했다. 더 자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아버진 내가 나올 때까지 계속 대문 앞을 서성이면서 지팡이를 아스팔트 위에 내리꽂으며 반복해서 오가셨다.
   아버지는 낮 시간에도 종종 우리 집에 들르셨다. 문을 열면 어김없이 한 손에는 신문을, 다른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서 계셨다. 외손자들에게 줄 군고구마며 군밤, 호두과자 등을 한 아름씩 사오곤 했는데, 가실 땐 꼭 나의 배웅을 받는 것을 기대했다. 우리집 대문을 나선 아버지가 점점 작아지면서 골목을 돌아나가시기까지의 대략 팔십 미터 정도의 거리, 그 거리가 나와 아버지의 작별의 공간이 되었다. 아버지는 골목의 모퉁이에서 사라지기 직전, 꼭 한번 뒤를 돌아보며 지팡이로 불규칙한 포물선을 그리셨다. 거기엔 나의 배웅에 대한 감사와 만족감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가 과천으로 이사한 뒤 돌아가실 때까지 오 년 간의 삶은 산소 호흡기에 의존한 삶이었다. 그런 극한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나름대로 새로운 배웅법을 개발하셨다. 예전 같으면 오라버니 식구들과 함께 대문 앞에서 나의 가는 모습을 지켜볼 터인데, 이제 그 배웅 일행에 아버지만 빠져 있었다. 허전한 마음을 안고 돌아서는데 가느다란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조심해서 가라. 잘 가라. 도착해서 꼭 연락해라.”
   사람 얼굴이 겨우 빠져나갈 수 있을만한 크기의 주방 창문에 아버지의 초췌한 얼굴이 매달려 있었다. 창문에 달린 모기장을 흔들고 계셨다. 주방 창문에서만 주차장이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 후 다시없을 것만 같았던 아버지와의 오가는 인사는 조석朝夕이 멀다하고 안부 전화로 이어졌다. 새벽 여섯 시에 어김없이 울리는 전화벨은 아버지의 단장 끝 징소리가 탈바꿈한 것이었다. 나는 그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깨어 예전처럼 하루를 시작했다. 그리고 저녁 무렵에 아버지는 하루 동안 별 탈 없었는지 하루를 마감하는 전화를 하셨다. 아버지의 전화는 나의 하루를 여닫고 있었다.
   “오늘 밤에 영원한 작별이 오더라도 잘 있거라.”라는 뜻이 담겨 있는 듯 아버지의 마지막 전화는 정말 진중했다.
   “차조심, 건강조심”이란 평범한 말이었지만.
   이제 천붕지통天崩之痛의 아픔을 겪은 지 일 년이 되었다. 나는 지금 그날의 배웅의 장소 앞에 서 있다. 그날 두텁게 차오르던 흙은 굳어지고 무덤 앞엔 아버지의 이름만이 나를 반길 뿐이다. 일 년이 흘렀다고 그 아픔이 희석될 리 없고 그저 연로하셨으니 어쩔 수 없다는 자위自慰로 아버지의 죽음을 잊을 수는 없다. 미수를 살다 가신 아버지의 병약했던 삶이 너무나 애달프다. 당신은 살신성인의 애국자도 아니었고, 명망을 얻은 사회인사로 군림하신 적도 없었다. 그저 가족을 사랑하는 평범한 아버지가 되는 것을 삶의 신조로 삼았을 뿐이다. 그러나 순국열사의 자식들이 어찌 우리 삼남매처럼 행복할 수 있었을까. 거부巨富의 자식들이 어찌 우리처럼 풍요로운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
   길고 긴 영면의 기차가 어디 만큼에서 잠시 멈추고, 아버지는 또 다시 지팡이의 포물선을 그리며 예전처럼 다정히 나를 마중 나오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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