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온당(世溫堂) / 문선자
분주하게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도시의 화려함보다 소재, 질감, 소리, 냄새, 공기 등 옛 향기가 나를 사로잡는다. 텅 빈 거리가 화려한 건물로 채워지고 얼마 남지 않은 빈 곳마저 상가로 변하고 있다. 변화의 물결이 이 도시마저 휩쓸고 있다.
내가 살았던 군산은 일본 강점기 때의 은행과 세관, 적산 가옥과, 근대 건축물을 둘러보는 탐방코스로 만들고 있다. 지금도 주말이면 수백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다녀간다. 관광객이 떠난 밤에는 이 공간만 현재에서 동떨어져 있다는 기분이 든다.
월명산 아랫자락은 이름에 걸맞게 시가지가 점점 확장되면서 새로운 주택가로 변하고 있다. 하지만 일제의 건물, 적산가옥이 여러 채 남아 있다. 적산가옥은 비교적 튼튼하게 지어져 백 년이 된 우리 집도 원형보존을 위해 문화재로 올려졌다.
가공되어 건조해진 냄새만 가득한 월명동 거리를 걸어본다. 내다 버린 저녁 풍경이 나프탈렌 냄새 같은 노을을 맞으며 구겨지고 있다. 입체적인 사각의 배경이 매몰되어 다가온다. 곳곳에 단 깃발은 나부끼고 기와 낮은 지붕 밑으로 고드름이 피어있다. 지붕에 매달린 고드름의 살갗이 손에 닿으면 건물의 뼈가 만져진다. 담벼락의 입술이 벌어진 채 말라 허물어지고 있다. 달그락달그락 손으로 때려 박힌 콘크리트 앞에 인부 한 명이 막 작업복을 갈아입는다. 무표정한 건물이 나를 바라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슬며시 다가간다. 허물어져 버린 집들, 나는 넋이 나간 채 하늘을 멍하니 쳐다본다.
옹색한 콘크리트 담장에 머리를 기대고 말라가는 풀꽃을 보고 있으니 자꾸만 눈빛이 깊어지고 마음이 시큰거린다. 아직 없애버리기에 이른 식물들이 무겁게 익은 햇볕 아래 누워 있고, 집회의 소음과 굴착기의 포효 속에서도 세월의 때가 묻은 나무 조각과 어지러워진 유리창들이 널려져 있다. 시계의 초침처럼 뾰족해진 햇살은 담장과 정원 사이에서 집과 함께 소멸하고 말았다. 몇 개의 굴착기가 관절을 비틀어가며 건물을 주저앉히고, 그 옆에선 인부가 얇은 호스로 물을 뿌린다. 건물 부스러기들은 모두 축축하게 다져져 거대한 무덤 같다.
켜켜이 쌓인 추억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너무 오래된 건물이라 보존할 것인지 없앨 것인지 의논 끝에 형체만 남기고 헐어 버린 것이다. 안타까움과 적막함이 교차했다. 이 건물이 과거 모습을 상상한다면 변해버림에 대한 세월의 무상함이라 할까. 건물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먹구름 뒤 해도 서산을 넘어가고 부러진 나뭇가지 사이에서 새들이 바삐 난다. 어둠이 잠긴다. 앞으로만 가는 시간은 뒤돌아볼 리 없다.
우리 집 적산가옥은 목조주택으로 이 층 집이었다. 이 층에는 왕골로 만들어 돗자리를 깐 다다미방으로 응접실과 서재가 있었다. 계단과 복도는 나무 바닥으로 되어있어 걸을 때 삐거덕삐거덕 소리 내 깨금발로 걸을 때가 많았다. 일 층 현관문 앞에는 아버지가 지은 세온당(世溫堂)이라 적힌 목조조각이 세워져 있었다. "세상에서 따뜻한 집!" 그 뜻 또한 깊은 아버지의 인품 같았다. 안방에는 어머니가 즐겨 말하는 "네 덕, 내 탓‘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었다.
일본의 전통 양식과 서양의 근대양식이 조화를 이룬 집이었다. 넓은 정원에는 계절 따라 꽃이 피고 나무들이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우리 가족의 삶과 함께한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 이 층에 앉아 창문을 열면 계절마다 다른 그림을 내다 걸어주는 월명산이 있어 좋았다. 예쁜 숲길 등산로가 있는 것도 복이었다.
가끔 아버지는 거실에 앉아 월명산 사계절을 탐미하며 시조를 읊곤 했다. 새잎이나 꽃비를 보시며 무언가를 그리는 눈빛이었다. 어떨 땐 소쩍새의 울음소리에 취해 마루에 나와 시조를 읊으시곤 했다. 대문과 대문을 마주 보고 있는 건물은 적산가옥을 매입하여 개축했던 성당이 있었다. 경건하고 성스러운 성모마리아상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빛을 비춰주며 우리 집을 보고 있었다. 나지막한 월명산의 봉우리들과 바다와 시가지를 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산책길을 걸으며 기쁨과 편안하고 아늑함을 느꼈다. 산바람을 마시며 나무들과 심미적 감동을 본능적으로 느낄 때도 있었다.
나는 월명산을 뛰어다니며 자연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쾌적한 환경과 멋진 경관을 만끽하며 젊은 날을 보냈다. 그렇게 벅적댔던 육 형제들은 제각기 공부하기 위해 한 명 두 명 서울로 떠났다. 장남인 동생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이 집을 지켰다. 동생이 어쩌다 새벽까지 책을 보고 있으면 새벽에 깬 부모님은 안방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날을 밝히곤 했다. 자식걱정. 건강걱정을 하며 때로는 웃음이, 근심어린 목소리가 동생 방으로 들곤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 집을 무척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겼으며 많은 사람도 부러워했다. 따뜻하고 평안한 이 집에서 두 분은 생을 마감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평생을 끼고 계셨던 캐비닛 속에는 가족들의 보물들이 가득했다. 일기장, 장부, 가족사진, 상장…. 등 소중한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속에서 세상이 공평한 것을 배웠고 남에게 상처 내는 삶을 살지 않는 겸허함을 배웠다. 우리 형제들의 성품은 그저 땅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뿌리 깊은 가르침에서 생겨났다. 추억의 창고에 보물이 되어 고스란히 남겨 있다.
내 기억 속의 도시는 이제 낯선 풍경으로 변해간다. 어쩜 내 어릴 적 살던 뒷길의 모습 같기도 하고 보존이 아니라 그냥 남겨진 채로 세월의 흐름과 함께 해오고 있는 건물들이다. 현재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뜯어보면 하나하나 보이는 옛 모습들은 제법 오래된 시간의 겹을 갖고 있다. 복원공사가 시작되니 시간이 멈춘 듯 옛 모습이 그대로이다. 그래서 월명동은 풍부한 시간의 별자리를 갖는다. 그리고 시간이 담긴 기억이다. 그곳에 살았던 기억만으로도 행복한 시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 정도 남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담장과 대문과 골목의 모퉁이에 스며있는 시간. 오래된 주마등 하나 허공에 매달려 희미하게 흔들린다. 세온당에서 아버지의 시조 읊는 소리가 낮은 담장을 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