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멋진 하루 이금희

 

 

 

그해 여름김포국제공항에서 그를 만났다일본 하네다공항으로 가는 비행기 수속을 마치고 공항 내 음식점을 찾았지만 이른 아침부터 모두 만원이었다가까스로 우동집 구석진 자리에서 2인용 탁자를 발견했다.

계산대에서 선불요금을 치르고 막 돌아서려는 순간 아뿔싸어느 중년신사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그는 들어오자마자 여행 가방부터 빈자리에 밀어 넣었다그제야 내 손에는 지갑만 달랑 들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렇다고 자리다툼을 할 수도 없어 합석을 청했더니 흔쾌히 허락했다막상 자리는 얻었지만 낯선 남자와 마주 앉아 식사를 한다는 것은 여간 거북한 일이 아니었다그도 어색한지 신문 활자에만 눈을 주고 있었다.

이윽고 음식이 나왔다그의 것도 동시에 나왔다그는 우동 한 그릇나는 우동 한 그릇에 김밥 한 줄을 더했다예의상 김밥을 가운데 놓으며 함께 먹기를 권했다사양할 줄 알았는데 그럴까요?” 하면서 한 점 집어 들었다싱긋이 웃는 모습이 선해 보여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식사가 끝나자 그가 한사코 차 한 잔을 사겠다고 해서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출국 시각까지는 족히 두어 시간 여유가 있었다그는 삼십 분 더 늦게 출발한다고 했다그는 오십 대 초반으로 나보다 세 살 위였다훤칠한 키에 군살 하나 없는 날렵한 몸매는 집 년쯤 젊어보였다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중저음 목소리는 부드럽고 안정감을 주었다 하얀 피부에 감색 싱글 재킷이 퍽이나 잘 어울렸다갑자기 베이징 법인에 출장을 가게 되었다며 볼멘소리를 했다본새로 보아 대기업 임원쯤으로 보였다나는 휴가차 후지산 등반과 오사카 등 옛 도시 몇 군데를 돌아볼 예정이라고 했다.

우리는 제법 잘 통했다말이 통하니 마음 문은 저절로 열렸다그는 비교적 솔직 담백한 편이었다무엇보다 내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여 주었다그가 들려주는 여행기는 흥미진진해서 어느새 빠져들고 말았다나도 상상의 아래를 펴고 그를 따라 몰디브 해변을 거닐며 석양을 바라보기도 하고아프리카 킬리만자로 정상에 올라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지며 분위기는 달달하고 쫀득쫀득해졌다부지불식간에 농담도 슬슬 주고받고 오빠 동생하면서 꽁냥꽁냥 하기도 했다손금을 보아준다고 했을 때는 뻔뻔한 수작임을 알면서도 못이기는 척 손을 맡겼다무릎과 무릎사이는 아슬아슬하게 맞닿기 직전이었으며 추가로 시킨 주스 한 잔에는 빨대가 두 개 꽂혀 있었다감정만큼은 젊은이들 못지않았다공항 특유의 설렘과 자유로움도 한몫했다어쩌면 잠시나마 그동안 목까지 꼭꼭 여미고 살았던 블라우스 단추도 두어 개를 풀어놓고 싶은 일탈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더니 하마터면 비행기까지 놓칠 뻔 했다부랴부랴 출국장으로 달려갔더니 게이트 앞에는 이제 서너 명만 남아 있었다그때였다그가 품안으로 나를 끌어들이더니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당혹스러웠지만 그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했다그의 품은 넓고 따뜻했다.

비록 몸은 헤어졌지만 여행 내내 마음은 그와 동행하는 기분이었다모든 것이 새롭고 살아 있는 느낌이었다일본말이라고는 겨우 옹알이 수준이지만 웬일인지 두려움이 사라져 낯선 도시를 맘껏 쏘다녔다후지산 산행은 그야말로 악전고투였다가파른 산길은 한 발짝 내디디면 두 발자국 뒤로 물리라 하고 고산병 증세로 속이 메스껍고 머리는 깨질 것만 같았다정상이 가까울수록 거센 비바람은 시커먼 화산재를 한 움큼씩 먹어주며 금방이라도 말려버릴 듯이 심술을 부렸다그래도 그가 손을 잡아주고 가만가만 등을 두드려주는 것만 같아 힘이 솟았다.

언젠가 친구들 모임에서 무슨 자랑꺼리인 양 그 얘기를 꺼냈더니 모두들 미친 노오옴 선수네!” 했다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싱겁다며 명함이라고 받아주지 그랬냐며 아쉬워들 했다맞다적어도 그날 감정대로라면 한 번만이라도 짜릿하고 낭만적인 밀회를 즐겼어야만 했다그러나 어쩌랴로맨스든 불륜이든 남는 것은 마음의 상처뿐인 것을.

벌써 십여 년 전 일이라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거리지만 어쩌다 문득 그때 일이 떠오를 때면 아직도 입술에는 부드러운 감촉이 남아 있고 잠자던 말초신경들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돌아보면 내 생애 가장 멋진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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