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 입자 / 맹난자
바람이 모래언덕을 실어 나르듯 시간은 우리를 저편 언덕의 모래톱 밖으로 실어 나른다. 의식은 몸의 상태에 갇혀 있는 듯, 간밤 모임에서 동료들과 헤어져 문을 나서는데 어둠 속에 웬 짐승 한 마리가 길을 막고 있었다. 점점 다가오는 그놈과 대결하여 주먹으로 이마를 밀쳐내며 안간힘을 쓰는데 좀체 밀려나지 않았다. 소리쳐 도움을 청하니 누군가 달려오고 그제야 놈은 떨어져 나갔다. 흉통을 느끼며 깨고 나니 꿈이었다. 무슨 암시가 아니었을까? 꿈에 소는 조상이라는데 하긴 전부터 꿈에서 어머니를 뵈면 병원에 입원할 만큼 아팠던 기억이 여러 차례 있었다.
예상했던 수명보다 5년을 더 살아 일흔 일곱 해라는 고개를 넘고 보니 지병이던 당뇨합병증 검사에서 심혈관 나이 85세라는 언도를 받았다. 얼떨떨했다.
봄날 산뜻하게 낙화하지 못하고 가지에 눌어붙은 누런 목련과 마주할 때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지' 하면서 역시 두려웠던 것은 코마상태인데 요즘 들어 뒷목이 편치 않다.
금년 봄, 휠체어에 앉아 "더 이상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 내일 삶을 끝낼 기회를 갖게 돼 행복하다."며 스위스에서 자발적 안락사를 택한 호주의 식물학자 데이비드 구달 박사가 떠오른다. 104세인 그는 이 나이까지 살게 된 것이 대단히 유감스럽다며 "행복하지 않다. 죽기를 원한다."고 했던 그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행복한가? 나 스스로에게 묻는다. 몸과 의지가 함께 작동될 때 기쁨도 행복도 기대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구달 박사는 몸이 의지대로 되지 않아 넘어지면서 삶의 질이 악화된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몸을 데리고 빙판 위를 춤추는 듯한 활발한 마음도 어느새 노년이 되면 몸이라는 그 사각의 링에 갇히고 만다. 불편한 이 불협화음을 깨닫는 게 노병사로 가는 과정이 아닐까 한다. 나는 지금 그 노상에 있다. 몸에서 생의 에너지인 신바람과 경쾌한 율동이 사라지자 감동이나 황홀이란 단어와도 점차 무관하게 된다. 비트 박자의 리듬이 빠져나간 몸은 바람이 새어버린 풍선과도 같다. 가도 좋다는 때에 이른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죽되 죽지 않는 것이 있다. 개인은 죽으면서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본질 자체가 종말을 맞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죽어 흩어짐은 형체만 흩어질 뿐, 담일청허한 기운의 뭉침은 끝까지 흩어지지 아니한다. 흩어진다 해도 그것은 태허담일淡一한 안에 있어 이미 동일한 기氣이다.
졸지에 남동생을 잃고 홍제동 화장터에서 멍하니 바라본 겨울 하늘, 솜뭉치 같은 하얀 구름이 덩실덩실 피어오르고 있었다.
오영수 선생 댁 근처의 연산군 묘에 산책 나가 선생과 말없이 앉아있을 때, 무거운 침묵을 깨고 "니 저 구름 좀 보래이." 하실 때도 파란 하늘에 흰 뭉게구름이 여러 형상을 보이며 지나갔다. 반백 년 전의 일이건만 요즘도 나는 구름을 보면 그때의 일들이 떠오르곤 한다. 실체 없는 구름에서 생사를 읽는다.
생사의 관계를 물과 얼음에 비유한 한산寒算 스님의 시구를 보기 좋게 입증한 아인슈타인의 '질량불변의 법칙'은 또한 얼마나 나의 가슴을 뛰게 하였던가. 물의 조건이 달라지면서 수증기로 증발되어 어느 날 한 점 구름으로, 다시 비가 되어 지상에 내려와 때론 얼음이 되고, 얼음은 다시 수증기가 되어 구름이 된다. 조건에 의한 관계 변화일 뿐, 생과 사도 이와 같아서 나지도 않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니. 이는 질량과 에너지의 변화일 뿐, 늘어나는 것도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불생불멸不生不滅 부증불감不增不減' 이라고 한다.
생멸하는 현상 속에 변치 않는 실재, 죽되 죽지 않는 그 한 물건[一者]을 생각하게 된다. 가되 어디로 가는 것인가.
어느 이른 새벽 꽃밭에 내리는 이슬비였다가, 어둔 밤 운동장에 혼자 내려 쌓이는 함박눈이었다가, 발도 없이 머리 풀고 하늘로 날아올라 구름이나 되었다가 그다음 다음은 허공 입자 虛空 粒子로 흩어지리.
어느 분의 손길인가. 요술지팡이가 지나간 듯 눈앞에 별들이 돋아난다. 삽시간에 뿌려진 별들은 허공의 입자만큼이나 가득하다. 검은 공단에 박힌 금강석 같다.
어느 해 겨울 나발라 촌村(남태평양 피지에 있는 원주민 촌)에서 만났던 소란스러운 은하계의 축제. 그날 밤 팝콘처럼 짧게, 폭죽처럼 길게 터지는 유성들이 빛줄기로 내 앞에 쏟아져 내렸다. 우주의 비의秘意를 잠깐 엿본 듯했다. 머리 위에서 듣던 주먹만 한 별들의 심장 소리가 푸카푸카 내 가슴에서도 들린다.
잡목 숲을 헤치고 남의 무덤 앞에 앉아 구수한 던힐의 시가 연기를 뿜으며 "니 저 구름 좀 보래이." 하시던 분의 음성도 허공 어디에선가 들릴 듯해, 밤하늘을 우러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