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 삶이 그리는 무늬, 인문학의 숲을 거닐다
최명숙
1. 인문학은 삶의 무늬를 읽는 것에서 출발한다
인문학, 요즘 인문학의 열풍이 대단하다. 당연한 일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에 대한 탐구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나’를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나’가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탐색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만나게 되는 게 자기의 삶이 그려낸 무늬이다. 그 무늬를 먼저 읽어야 한다. 그러면 그 무늬를 이해하게 되고 아울러 내면의 ‘나’와 화해하게 된다. ‘나’와 진정한 화해를 한 후에 ‘너’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이 또한 건강한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자기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바쁜 현대의 삶 속에서 앞에 주어지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급급하여 이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는 역할에만 몰두하여 나를 잊어버리고 산 것에 대해 깊은 회한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떻게 나머지 삶을 살아야할지 몰라 허둥대는 경우가 많다. 잡고 있는 것을 놓아야 할 입장이 되어도, 너무도 익숙해진 지금까지 삶의 방식 때문에, 알면서 기회를 놓치기도 한다.
내 삶의 무늬를 읽고 내면의 ‘나’와 화해했다면, 다음은 타인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자녀는 부모 삶의 무늬를 읽어주고, 부모 또한 자녀 삶의 무늬를 읽어주며, 부부는 서로의 삶의 무늬를 읽어주고, 너와 나 또한 그러해야한다. 친구가 서로, 사제가 서로, 상사와 부하가 서로, 이웃과 이웃이 서로, 각자에게 있는 삶의 무늬를 읽어주고 이해한다면, 서로 간에 갈등이 있을까. 진정한 부모자식 관계로, 친구로, 스승과 제자로, 동료로, 이웃으로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그 삶의 무늬는 마음의 무늬이기도하다. 마음의 무늬는 누구나 다르다. 무늬가 다채로울수록 삶의 모습도 다채로울 것이다. 그것을, 그 마음을, 우리는 서로 읽어주고 이해해줘야 한다. 인문학 이해는 여기서부터 출발하고, 이 또한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된다. 기억하자. 인문학은 ‘나’의 삶의 무늬를 읽고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타인으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을. 1차적으로 그렇게 될 때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한 삶으로 나아갈 것이다.
2. 행복한 삶이란 어떤 삶인가
무한경쟁의 구조 속에서 인간의 삶이 경직되고 불안한 것이 현대사회의 모습이다. 여기서 독자적인 삶을 살기란 쉽지 않다. 날마다 시기마다 과제처럼 주어지는 역할이 있고,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않을 때에는, 생활의 근간이 흔들릴 것 같은 강박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더구나 끊임없이 요구되는 경쟁 속에서 우리의 삶은 대내외적으로 피로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류에 휩쓸려 중심을 잃은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다보면,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는 포말과 다름없이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진정한 자아와 마주하게 되었을 그 때 말할 수 없이 황량한 기분에 휩싸이고 만다.
바로 그 황량한 기분이 중요하다. 그것을 느낀 적이 있다면, 우리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고자 하는 시도를 할 수 있다. 그건 나이와 상관없고, 경제적 부와 상관없다. 오직 민낯의 나, 배경이나 입장을 배제한 진정한 나, 인간 본연의 나이면 된다. 어쩌면 그것은 현재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놨을 때 찾기가 쉬울 수 있다. 또는 가졌다하더라도 그것에 비중을 두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삶이 그리는 무늬에 더 비중을 둔다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인간의 삶의 양식을 두 가지로 말했다. 그것은 소유의 양식과 존재의 양식이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행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하는 문제는 마땅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에서 말하는 인간의 삶의 양식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더욱이 지금과 같은 현실 속에서는.
학생들에게 가끔 질문을 한다. 왜 대학에 들어왔느냐고. 그러면 많은 학생들의 대답이 취직을 잘하기 위해서란다. 취직을 잘하고자 하는 목적에 대해 재차 물으면, 모두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한다. 돈을 많이 버는 곳에 취직하는 게 잘하는 것이고, 그것을 목표로 대학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쯤이면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것에, 그것도 취직이 가장 안 된다는 인문학을 가르친다는 것에, 맥이 빠지고 만다. 마지막으로 재차 묻는다. 돈을 많이 벌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고. 그러면 모두 남들처럼, 또는 남들만큼, 혹은 남들보다 잘 살고 싶어서란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격앙된다. 왜, 남을 그렇게 의식하느냐고. 스스로 만족한 삶을 살면 안 되느냐고. 남과 비교하지 않으면 안 되느냐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 자체 그 존재에 의미를 두고 살면 안 되느냐고 말이다. 남과 비교하는 순간 자신이 위축되고 열등감에 빠지며 비루해지지 않겠느냐고. 그때야 학생들은 조금 심각해진다.
어쩌면 솔직히 현실적으로 보면 시대착오적인 발상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가지려고만 든다면 그 삶이 행복해질까. 무저갱처럼 끝이 없는 인간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을까. 옛 말에도 아흔아홉 섬의 쌀을 가진 사람이 한 가마니 쌀을 훔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소유욕은 끝이 없는 게 인간의 속성이다. 가지려고만 든다면 행복해질 수 없다. 프롬의 제언처럼 나 스스로의 존재 자체에 의미를 갖고 존재의 양식으로 사는 삶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에는 프롬도 이야기했지만 기본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만큼 소유하는 것은 타당하다. 인간이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진대, 그렇다면 두 가지 삶의 양식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3. 작품과 역사 속에서 인문정신을 만나다
톨스토이의 동화「대자」에 ‘모닥불 피우는 이야기’가 나온다. 목동들은 마른 나무를 주워 불을 피우고, 곧 젖은 나무를 올려놓는다. 여러 번 시도해도 불을 피우지 못하자 대자가 알려준다. 마른 나무가 활활 타오르고 난 후에 젖은 나무를 올려놓으라고. 오래전에 읽은 동화인데 이 부분이 인상적으로 남아 있었다.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누구나 어려움을 만나게 된다. 그 강도의 정도에 따라 수월하게 넘어갈 수도 있고, 삶의 근간이 흔들려 좌절할 수도 있다. 자기를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휘청거리기도 한다. 그럴 경우 이 모닥불 피우는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어떨까. 마른나무인 ‘나’가 먼저 활활 타올라야 젖은 나무인 ‘너’를 태울 수 있다는 이 지혜로운 이야기를 말이다. ‘나’가 행복해야 옆에 있는 사람이 행복해지는 법이다. 가족을 위해,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것처럼 고귀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 이전에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충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 않고 진정한 희생이 있을 수 없다. ‘나’가 불타올라야 ‘너’를 불태울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 우리나라의 사상사에 영향을 끼친 분이다. 1801년 유배되어 집과 가족을 떠나 있으면서도, 아들들의 삶과 교육 인간관계 등에 있어서 아버지로서 그리고 스승으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 편지를 통해 가르친다. 그뿐 아니라 제자들에게까지 그 가르침을 놓지 않았다. 다산은 자녀들을 가르치는 데에 그 근본을 효제(孝悌)에 둔다. 이 사상은 지극히 인문적이다. 효제가 아니면 독서도, 학문도, 사람이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효제는 유교가 목표로 삼았던 치국평천하나 수신제가를 위한 핵심적 실천논리이다. 풀어보면 부자자효형우제공(父慈子孝兄友弟恭)으로, ‘아버지는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은 아우와 우애롭게 지내고, 아우는 형에게 공손하게 대한다’는 의미이다.
다산은 폐족이 되어버린 현실에 좌절하지 않았다. 폐족이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다고 자녀들을 격려한다. 본인 역시 그러했다. 유배지에서 수백 편에 이르는 저서를 저술하게 된다. 또한 후학을 양성하며, ‘황상’과 같은 훌륭한 제자를 만난다. 황상과 다산의 관계에서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한다.
물질문명이 발달하고 도구적 이성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며, 우리의 삶을 불확정적이고 불안정하게 만드는 현실에서, 호연지기를 기르며 학문하는 자세를 잃지 말고, 현실의 삶에 충실하고 효제를 공부의 근본으로 삼기를 당부하는 다산의 사상은 지금과 같은 현실에서 빛을 발한다. 개인주의가 팽배하여 가족이 해체되고 가족 간의 질서가 붕괴되는 현실이다. 이 때 사람의 삶에 근간이 되고 바탕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무너져가는 삶의 질서를 회복하고 인문학적 소양을 고양시켜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효제’가 아닐까 싶다.
무한경쟁의 사회구조 속에서 인간의 삶은 경직되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인문정신으로 주체성을 가진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한 길을 걸어간 분들의 삶을 통해 인문학적 소양을 고양하고, 자기 주도적 삶을 살아가게 한다. 그 인문정신은 문학으로 구체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