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나 최민자  

 

 

 

글은 사람이다깜냥대로 쓴다섬세한 사람은 섬세하게 쓰고 묵직한 사람은 묵직하게 쓴다제 몸뚱이를 척도尺度로 세상을 재는 자벌레처럼 글이 사람을 넘어설 수는 없다몸 속 어디 침침한 곳에 미분화된 채 고여 있는 생각들강고한 존재감으로 물질성을 획득한 기억과 상념들을 색출하고 용출해 방출해내는 작업이 글쓰기이다한 삼태기의 꽃잎을 쥐어 짜 한 방울의 향료를 추출해 내는 일처럼 몸 안에 스민 생각들을 걸러내 활자화하는 공정도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다.

사진이 이미지의 물질화라면 글은 영혼의 지문 같은 것이다보고 듣고 느끼고 사랑한 것온몸으로 관통해온 시간이 녹아들어 문채文綵로 드러나는 것이라면 글의 우열을 따지는 일은 영혼에 눈금을 매기는 일처럼 부질없는 처사일지도 모른다꽃이 저마다의 체취로 향기롭듯 글도 제각각의 취향으로 빛난다그럼에도 좋은 글은 분명히 있다너무나 명철하고 아름다워서 통증까지 유발하는 글들도 많다.

어찌하면 좋은 글을 지어낼 수 있을까세상은 넓고 글 잘 쓰는 사람 또한 너무나 많다깊고 깊은 인문적 통찰예리하면서도 서정적인 여운을 거느린 문장들이 빠르고 정확하게 내리꽂히는 강속구처럼 내 뇌리를 강타한다근원적이고 존재론적인 탐색들시퍼렇게 날이 선 직관과 빛나는 성찰의 문장들을 만날 때마다 글이란 결국 삶의 이력이요 사람 자체임을 여지없이 실감하곤 한다앙상한 서사에 덧입히는 상상이나 어설픈 감성의 거스러미를 건드리는 재주만으로는 존재의 심연에까지 당도할 파동을 생산해낼 수 없을 터이므로.

처음나는 내 글들이 이룬 바 없이 시들어가는 나를 조금이나마 돋보이게 해줄 장식깃털이 되어주기를 바랐다시간의 물살에 마모되고 감가상각당한 외피보다 벼려지지 않고 방치되어 있던 내면이 뜻밖의 빛을 발할지 모른다는 기대감도 없지 않았다그러나 나는 풀을 뜯어먹고 우유를 생산하는 소도척박한 언덕에서 환한 노랑을 길어 올리는 개나리도 되지 못하였다세상을 향한 온기도 존재의 품위도 드러내지 못하고 옹색하고 얄팍한 마음 안팎의 풍경이나 자지레한 일상의 단면 따위를 아둔한 필치로 그려냈을 뿐이었다바람 부는 광야를 관통해 본 적도고요해 홀로 깊어 본 적도 없으니 무엇으로 깊이와 넓이를 더하랴깊게 파고 싶으면 넓게 파야 된다는 상식에 눈 감은 채 우물 안 고인 물이나 퍼 올리고 있었음을 이즘에야 아프게 절감하곤 한다.

한 가지 소득이 있었다면 글이 나를 빛내주는 장식은 되어주지 못했다하여도 깃털노릇은 해주었다는 사실이다스테고사우루스의 등줄기에 돋아있던 멋진 골편이 장식용이 아니라 실존에 불가결한 체온조절의 방편이었듯이 글쓰기는 내 게 삶의 덧없음과 허망으로부터그 공격적 허무로부터 방어하고 붙들어주는 존재의 외피와 다름 아니었다피아니스트가 열 손가락으로 천상의 선율을 터치해 내듯 나 또한 열 손가락으로 컴컴한 내면의 지층을 더듬는다얼짱 각도로 셀카를 찍고 포토샵으로 보정한 가짜 이미지를 진짜 자기라고 착각하는 소녀처럼키보드가 분식해 낸 활자들 속에서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아내려 애쓴다글이 몸통이 되지 못하고 깃털일 밖에 없는 사람을 글쟁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도 나는 모니터를 마주 하고 있을 때 가장 나다운 충일함을 느낀다저 무식한 직사각의 아가리가 내 생의 시간들을 속수무책으로 빨아들이는 무시무시한 블랙홀이라 하여도 그 팽팽한 긴장과 대결의 시간이 없다면 호시탐탐 덮쳐누르는 불안과 허무를 견뎌낼 수 없을 것이다.

좋은 글쟁이가 되지 못하여도 좋은 독자로 늙어갈 수 있다면 그 또한 충만한 축복일 터이다뽕망치로 쾅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나는 문장을 만나는 일만큼 살아있음을 각성시키는 순간도 흔치 않다예나 지금이나 나를 가장 매혹시키는 사람은 글 잘 쓰는 사람이다늙던 젊던대머리건 털북숭이건살아있건 고인이 되었건 마찬가지다예리하게 벼려진 감각으로 성찰의 깊이를 드러내는 문장의 근력이 초콜릿 복근보다 백배는 더 매혹적이다엔진의 동력과 파괴력이 다른 글들문자향서권기文字香 書券氣가 기품 있게 풍겨나는 그런 글들의 위엄 앞에서라면 언제라도 나는 흔쾌히 좌절한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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